▲ 정원 스님이 소신한 광화문 광장 옆 열린공원.

하나뿐인 목숨인데

최근 아이돌스타가 세상을 달리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자에 대한 추모방송을 보니 자연스럽게 슬픔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는 왜 세상을 달리해야만 했을까?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목숨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랜 가르침입니다.

하나뿐인 목숨입니다. 숨이 끊어진 자는 나무토막과도 같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생명이 다하면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도 없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과 붙어 있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큽니다. 그럼에도 전쟁광들은 “언젠가 죽을 목숨이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부추깁니다. 반면 평화를 중시하는 자들은 “오로지 한번 뿐인 목숨이다.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라며 고 말합니다.

강연을 듣고 나서 극적인 변화가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 ‘6기 눈부처학교’ 마지막 강연은 ‘자살’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10월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한양대 인문관에서 열린 눈부처학교는 총 11강입니다. 12월 28일 마지막 강연은 정평불 고문이자 정평법회 지도법사인 박경준 교수의 ‘정원스님 및 문수스님 소신공양의 의미와 평가’에 대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자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자살을 아무리 미화하여도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살을 미화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뿐인 생명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하다 안 되면 죽어 버리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무책임한 발상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무시한 단멸론적 생각이 되기 쉽습니다. 박경준 교수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강연을 듣고 나서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박경준 교수는 준비한 자료와 강연을 통하여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의 행적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글이나 강연에서는 자살이라는 말 대신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다 안 되니 스스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살도의 실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의 소신(燒身)에 대하여

정원스님은 올해 1월 7일 분신했습니다. 촛불항쟁이 막바지에 치달을 무렵 약간 소강상태가 있었습니다. 더욱 더 촛불이 거세게 일어나기 위해 타이밍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1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정원스님은 왜 소신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정원스님은 왜 대중공양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비판론자는 수긍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신공양할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수스님은 2010년 5월 31일 소신했습니다. 문수스님 역시 소신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준비된 장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석존은 일찍이 《중아함경》에서 “만일 스스로도 요익하고 남도 요익케하며 많은 사람을 요익하게 하고 세간을 가엾이 여기며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 이치와 요익을 구하며 안온과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이면, 이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서 제일이고 위대하고 높고 우두머리이고 뛰어나고 존귀하고 미묘하다.”라고 설하신 바 있다. 요컨대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틱쾅둑 스님이나 전태일, 강희남 목사나 문수스님, 그리고 정원스님의 경우 그들은 남을 이롭게는 하였지만 자신을 이롭게 하지는 못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그들의 죽음을 이른바 ‘자기희생’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삶의 가치를 수명이라는 시간의 척도로 재려고 하는 통속적인 고정관념의 산물일 수도 있다.

삶의 목적을 ‘자기실현’이라고 본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짧고 굵게’ 질적으로 충실하고 값지게 사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현실화 하는 것이며, 잠재적 능력은 근본적으로 가치 창조의 능력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분신은 ‘수많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라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였고, 그러한 큰 가치를 창조한 그의 분신은 결국 ‘자기희생’이 아닌 ‘자기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수스님과 정원스님의 죽음 또한 그것이 급박한 상황에서 온 생명을 위해 대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그보다 더 지혜로운 방편이 없고 그 보다 도 효과적인 방법이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피적 자기파괴가 아니라 적극적 자기실현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생산적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들은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음 직하며, 따라서 두 스님의 죽음을 우리는 ‘소신공양’ 또는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라고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경준 교수, 정원스님 및 문수스님 소신공양의 의미와 평가, 18쪽)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의 자살에 대하여 보살행이라 했습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론자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자살을 미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박경준 교수는 “필자는 지금도 누군가가 두 스님과 같이 분신하겠다고 나선다면 반대할 것이다.”라며 분명히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결행된 사건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반적 자살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소신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틱쾅둑’ 스님이 유명합니다. 유투브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결정한 ‘기획소신’이었다고 합니다.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전태일이 분신했습니다. 역시 목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목숨을 끊는 것과는 천지차이 보다 더 큽니다. 이에 대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로 설명합니다.

소신을 아무리 미화한다고 해도 그것이 남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소신한 것을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을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면, 즉 자기희생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다지 높게 평가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유익하고 남도 유익한 것이 되었을 때 가치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구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정원스님과 문수스님, 두 분의 스님에 대하여 생사해탈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와 정황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생사 해탈했다는 것은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경지를 체득했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철저하게 자기검증이 이루어졌음을 말합니다.

생과 사를 초월한 자에게

생과 사를 초월한 자에게 있어서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범부들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은 삶도 바라지 않고 죽음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자아관념이 떠난 무아(無我)의 경지인 아라한에게 있어서 삶은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아관념이 있는 자에게 있어서 오온의 죽음은 정말 죽음이지만,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아인 자에게 있어서 죽음도 관념이라면 삶도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과 삶을 초월한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어찌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라고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ThagA.II.257)라고 설명 했습니다.

장수축원 해 주는 이유는

아라한의 인생관은 생사일여(生死一如)입니다. 삶과 죽음을 초탈한 자에게 있어서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불사(不死)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라 했습니다. 불사의 진리를 본 자에게는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감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법구경 천의 품에 따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과 불사의 진리와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이러한 것들을 본다면 차라리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단지 구십년, 백년을 밥만 먹고 숨만 쉬고 산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경준 교수는 “짧고 굵게”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병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축복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최대의 축원은 ‘장수축원’이라 합니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축복 보다 더 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경해 주는 자에 대하여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 (ciraṃ jīva, dighamāyuṃ pālehī)”(A5.58)라며 축원을 해줍니다. 또 보시하는 자에 대하여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Dhp.109)라며 축원을 해줍니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밥만 먹고 숨만 쉬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장수축원 해주는 것은 오래 사는 동안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로 잘못 살았다면 남는 기간만이라도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여 선업(善業)을 많이 지으라는 것입니다. 목숨이 연장될수록 선업 지을 기회가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박경준 교수의 마술

불사(amata)의 진리를 맛본 자에게는 오래 사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생사가 일여이기 때문에 불사의 진리를 맛 본 자에게는 생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죽음도 삶도 자신의 것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오온이 파괴 될 때 정말 죽음이 찾아 옵니다. 하지만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연기법에 따른 오온의 생멸은 감지되지만 늙음, 죽음이라는 말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마술을 보여 주며 설명했습니다.

박경준 교수는 생사일여를 설명하면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하고 쳤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라 합니다. 이는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라며 묻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나(我)는 없는 것이라 합니다. 단지 인연화합에 따른 붙여진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거짓 나라 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은 게송을 연상케 합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 한다면 잘못된 의문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등의 질문에 대하여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S12.35)라 했습니다. 나나 존재라는 것은 다만 명칭만 있을 뿐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S12.35)라며, 연기의 유전문과 연기의 환멸문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할 뿐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장미를 볼 때 내가 장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현상이 장미라는 현상을 본다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이 별도로 있어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나는 단지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 됩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이라는 명칭은 있지만 모두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과 손바닥으로 바닥을 때리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불이 켜지는 것도 조건이고 불이 꺼지는 것도 조건입니다. 불은 다만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 불이 실체가 있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나(我)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

박경준 교수는 생사일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죽음이라는 실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있다면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서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망상가형 하느님(Brahma)에게 “하느님이여, 나는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 나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땅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땅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 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연기적 관계 속에서 단지 명칭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지 실체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땅뿐만 아니라 ‘물, 불, 바람, 존재, 신들, 창조주, 하느님,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모든 것’에도 적용됩니다.

경에서 ‘모든 것(Sabba)’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명칭 붙여진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늙음, 죽음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것은 모든 것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sabbassa sabbattena ananubhūtaṃ)”(M49)라 했습니다. 모든 것에 ‘죽음’을 대입하면 ‘죽음은 죽음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가 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연기적 관계 속에서 단지 죽음이라는 명칭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지 죽음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죽음이 경험되지 않는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타인에게도 유익한

연기법을 아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면 연기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생사해탈한 자’에게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에 대하여 ‘자기검증 된 자’라 했습니다.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이 소신을 했지만 자기희생이라기보다는, 자기검증 된 자의 행위로 봅니다. 생사를 초월한 자에게 자기희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자리이타의 실현으로 봅니다. 자신에게도 유익한 것이고 타인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화장용 장작의 경(A4.95)’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든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A4.95)

박경준 교수는 자리이타(自利利他)행을 강조했습니다. 자리이타행은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말보다 더 수승한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살도’이기 때문입니다. 두 스님의 소신은 자신뿐만 아니라 중생들을 위해서도 유익한 공양이었을 말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 (A4.95)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허물없는 자살에 대하여

자살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단지 삶이 힘겨워 사는 것이 지겨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게 봅니다. 그러나 청정한 자의 자살은 부처님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는 자살이라는 불리한 내용까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청정한 자의 자살에 한합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고디까의 자결(S4.23), 박깔리의 자결(S22.87), 찬나의 자결(S35.87)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칼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런 자살에 대하여 경에서는 허물없는 자결, 비난 받을 수 없는 자결이라 합니다.

번뇌가 다한 생사일여인 자에게 삶과 죽음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 있어도 축복이고 죽어도 축복입니다. 그래서일까 우다나에서는 번뇌를 부순 자에 대하여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Ud.45)라 했습니다. 그런데 일시적 해탈에 이른 자에게도 죽음은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라도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가 칼로 자신의 목을 베었을 때 두 가지가 성취된다고 했습니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했다고 해서 이를 빠알리어로 ‘사마시시(samasīsī)’라 합니다. 임종순간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자에 대하여 ‘시마시신(samasīsīn:首等者)’이라 합니다. 이 용어는 주석에서 볼 수 있는데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서 처음 나타나는 단어라 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자살은 죄악입니다. 그럼에도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범부의 자살은 죄악이지만, 성자의 자살은 죄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자살을 방조하기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자살을 허락한 경우가 있습니다. 탁발하다가 남의 준 것을 먹다 보면 콜레라 등 병에 걸렸을 경우 등, 치유 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허물없는 자에 한해서 자살을 허용한 것입니다.

정의로운 삶을 위한 대자대비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 따르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Stn.588)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자살을 아무리 미화하고 찬양한다고 해서 자살 그 자체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비판론자와 회의론자들은 자살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정한 자의 자살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청정한 자의 자결에 대하여 부처님도 허용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자리이타 행에 따른 대승보살행입니다. 법화경 등 대승경전에도 실려 있는 소신(燒身)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해탈을 이룬 자의 소신을 말합니다. 이런 소신에 대하여 자리이타행이라 합니다.

박경준 교수는 《숫따니빠따》 ‘담미까의 경’에서 두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살생하는 것을 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Stn.394)와 “남이 거짓말 하는 것을 묵인해도 안 된다.” (Stn.394)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불의(不義)를 보고 참지 말라는 말입니다. 불자라면 당연히 오계를 지켜야 하지만, 남이 오계를 어기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말입니다. 정의로운 삶을 위해서는 자비의 분노도 필요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 다면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공양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살을 미화하지도 않고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자살하려 한다면 적극적으로 말릴 것입니다. 그러나 청정한 자가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비로운 보살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자살도 아니고 자기희생도 아닙니다. 자기검증 된 자의 대자대비에 따른 중생들을 위한 소신공양입니다.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의 소신이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스님의 소신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법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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