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완 무심선원장.

어떤 이가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 앞의 측백나무.” 그가 따졌다. “스님께선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마십시오.” 조주가 말했다. “나는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 앞의 측백나무.”

서쪽에서 중국으로 온 조사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선(禪)을 전해 준 보리달마를 가리킨다. 보리달마가 중국으로 온 뜻은 선을 전하기 위해서이니,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는 질문은 곧 “어떤 것이 선입니까?”라는 질문이다. 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선방에 앉아서 좌선하며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겠지만, 이 질문에서 선은 그런 뜻이 아니다. “어떤 것이 선입니까?”라는 질문은, “어떤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까?” “어떤 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까?” “어떤 것이 깨달음입니까?” “어떤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까?”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어떤 것이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입니까?”라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조주는 다만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만 대답하였다. 뜰 앞의 측백나무는 눈에 보이는 사물로서 분별되는 물건이니 하나의 경계(境界)이다. 경계란 그것과 그것 아님의 경계선을 가진 것, 즉 분별되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인 분별심이 행하는 일이므로, 불교의 진리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러므로 질문자는 “스님께선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마십시오.”라고 따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주는 “나는 경계를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그가 다시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동일하게 묻자 앞과 같이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답했다. 따라서 조주가 말하는 “뜰 앞의 측백나무.”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사물인 측백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조주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말한 것이다. 깨달음은 우리의 분별심을 넘어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으로서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경전에서 말하고 있고, 선을 전한 조사들도 모두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유마경󰡕에서도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은 경계이지,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조주는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말함으로써,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주가 왜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말했는지를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뜰 앞의 측백나무.”가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주가 두 번씩이나 명백하게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관심을 가지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조주의 이 말을 듣고서 사방이 꽉 막힌 막다른 골목에 갇혀서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뜰 앞의 측백나무.”는 어떠한 추측이나 상상이나 헤아림이나 짐작이나 느낌이나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다. “뜰 앞의 측백나무.” 앞에서는 마음도 쓸 수 없고 몸도 쓸 수 없고, 알아도 소용없고 몰라도 소용없고,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그렇지만 “뜰 앞의 측백나무.”는 명백히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쯤 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선이 그런가?’ 하고 비웃을 것이고, 끈기가 없는 사람은 쉽사리 좌절하여 포기할 것이다. “뜰 앞의 측백나무.”는 아무런 맛도 없고 느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행동할 것도 없지만, 우리 마음의 실상인 깨달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김태완 | 부산 무심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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