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미국, 2014)의 오프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흰 팬티만 입은 남자가 결가부좌를 한 채 공중부양 중이고, 그의 어깨 너머로 <버드맨> 포스터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진중한 저음이 들렸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 여긴 정말 끔찍해. 거시기 냄새가 진동하잖아.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팬티만 입은 남자는 공중부양도 가부좌도 풀고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현실은 좁은 분장실이었습니다. 지저분한 세면대와 낡은 소파에 마구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 그리고 곰팡이 핀 벽지가 보였습니다. 이 첫 장면은 <버드맨>의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의 상황을 센스 있게 보여주었습니다.

우스꽝스럽게 흰 팬티만 입은 채 공중부양 중인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액자에서 보이는 버드맨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버드맨은, 흰 팬티 남자가 오래전에 맡았던 영화 속 배역이고, 그는 이 역할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자아는 어느새 버드맨이라는 새로운 자아로 대체된 것입니다. 오프닝은 바로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고, 영화는 인간의 보편적 삶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개개인이 맡은 다양한 역할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배역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으며, 영화는 삶의 이런 모순성을 지적하고, 아울러 주체적 자아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드맨>은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과 촬영상이라는 주요 부문을 수상한 대단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다음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2년 연속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레버넌트>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그의 가치관과 그걸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감탄했는데, 이 영화 <버드맨>은 <레버넌트>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같은 감독이 이렇게 다른 색깔의 영화를 만들면서 완성도면에서 어떤 경지를 이뤄낸다는 것은 천재에게만 가능한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감독이었습니다.

<버드맨>의 리건 톰슨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희곡을 원작으로 연극을 제작하고, 그 자신이 주연을 맡아 다시금 대중의 주목을 받길 원합니다. 리건 톰슨은 과거 <버드맨>이라는 슈퍼히어로물의 주인공으로 헐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렸던 톱스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했고, 그의 명성은 대중들에게 빠르게 잊혀져 갔으며, 지금은 늙은 퇴물 배우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리건 톰슨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무척이나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브로드웨이로 왔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직접 연출하고 또 주인공도 맡아 히트시킴으로써 보란 듯이 제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꿈은 사실 헛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그가 슈퍼히어로 역할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진정한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브로드웨이 연극무대는 진정한 프로를 원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블록버스터 시리즈 주인공이 레이먼드 카버의 연극에 출연하겠다는 것도 큰 비약이었습니다. 어린이용 만화영화를 보던 사람이 갑자기 철학책을 곁눈질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주변의 반응은 사뭇 시큰둥했습니다. 그의 연극을 홍보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은, 연극에 관한 것은 물어보지 않고 과거 그가 동안 피부를 갖기 위해 돼지 정액을 주사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며, 그것만 재차 확인했습니다. 대체로 퇴물 슈퍼 히어로의 이미지를 벗으려고 이 연극을 한다는 시각으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가 보여줄 연기나 그가 만드는 연극에는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브로드웨이 연극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임지 기자는 리건 톰슨에게 악평을 예고했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기자에게 술도 한 잔 샀는데, 재능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연예인이 연극무대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좋은 무대가 설 자리를 빼앗은 것에 분노하며 연극을 아주 박살내겠다고, 오히려 협박까지 했습니다.

이번 연극으로 재기하고자 리건 톰슨은 그의 모든 걸 쏟아 부었습니다. 하나뿐인 딸에게 주기로 했던 집까지 연극에 투자했습니다. 연극이 망하면 그는 끝장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도 빈털터리가 되고, 명성은 오히려 연극을 안 하니만 못한 상황으로 떨어지는데, 이렇게 상황은 자꾸 꼬여만 갔습니다.

리건 톰슨이 브로드웨이에서 재기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아분열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혼자 있을 때는 오프닝에서 들렸던 그 저음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버드맨의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거는 인물은 그의 허상의 자아인 것입니다. 리건 톰슨은 버드맨이던 시절에 대한 욕망을 꿈꾸고 있는데 현실은 그의 이상과는 점점 멀어져만 갔고, 혼자 있을 때는 그 버드맨과 중얼거려야 했습니다.

날아오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이 추락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브로드웨이를 기웃거리는 퇴물배우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고, 재정적 압박도 만만찮고, 정신적으로도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다시 한 번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이카로스의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과욕을 부려 더 높이 날아오르려다 결국 추락하게 된 이카로스처럼 그 또한 브로드웨이에서 장엄한 추락을 준비하고 있는 꼴이었습니다.

마침내 리허설만 해오던 연극을 초연하는 날이 됐습니다. 그날 리건 톰슨은 진짜 총을 갖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코를 스치는 것에서 그쳐 코를 다시 만드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코를 잃은 대가로 그에게 악평을 예고했던 기자로부터 “미국 연극의 사라진 동맥을 다시 살렸다”는 호평을 들었으며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입니다. 코 재건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있는 리건 톰슨에게 제작자는 대성공이라고 부추기고 다들 연극이 잘 된 걸로 들떴습니다. 그런데 딸이 꽃병을 찾으러 간 사이 리건 톰슨은 사라졌습니다. 창문은 열려있고, 병실로 들어온 딸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영화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막을 내렸습니다.

모호한 결론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반복되어왔던 설정과 앞뒤를 맞춰보면 매우 타당한 결말입니다. 앞에서 보면 리건 톰슨은 공중부양을 했고, 초능력으로 물건을 부셔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버드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의 허상의 자아인 버드맨이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것이 곧 밝혀지곤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놓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연극과 현실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백스테이지를 배경으로 배우들의 무대 뒤 얘기와 함께 연극 속 장면이 번갈아가며 아주 빠르게 전개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 것이 연극이고 어떤 것인 현실인지 헷갈리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는 무대에서는 지나치게 진실을 강조해 소품으로 진짜 총을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에 무대 밖에서는 사기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게 가짜였습니다. 연극과 현실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는 역할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졌는데 이는 리건 톰슨이 버드맨이라는 역할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 채 환상 속을 부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둘 다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설정을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현실 또한 또 다른 환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무대에서 리건 톰슨은 분명 진짜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총알이 코만 스쳤다는 것이 이해하기 곤란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현실이 아닌 이유입니다.

영화 중간에 타임스스퀘어 광장에서 마주친 무명배우의 대사에서도 이런 암시를 보여줍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인데 이 영화의 주제를 보여주고 있으면서, 인생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꺼져라, 꺼져라, 가냘픈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기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장한 듯이 떠들어대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백치가 떠드는 일장의 이야기, 소란으로 가득 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영화 <버드맨>은 인간이 처한 삶의 단면을 철학적이면서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통해 보여준 인간의 삶이란, 연극배우의 무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역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짜 자신을 잃어버린 인간들, 이들은 타임스스퀘어 광장 무명배우의 대사에 나오는, ‘그림자’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은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 것은 더 깊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환상을 환상인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일까요? <버드맨>을 통해서 보면 적어도 맡은 역할은 아닙니다. 그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 존재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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