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대열반을 얻는 길은 계·정·혜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정·혜 삼학(三學)을 닦으면 어떻게 해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는가. 경에서는 계·정·혜를 닦으면 악(惡)을 파하고 선근이 증장되어 불성이 개발되므로 열반을 증득한다고 한다.

먼저 악을 파하는 삼학으로, 첫째는 계를 닦아서 나쁜 율의〔惡律儀〕를 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쁜 율의는 악행을 일삼는 것으로, 열여섯 가지가 있다.

이익을 위하여 짐승을 길러서 살찌워 팔거나, 이익을 위하여 이런 것들을 사서 잡는 행위, 사냥하거나 낚는 행위, 이간시키는 말을 하거나, 용을 주문으로 길들이는 행위에 이르는 악업을 말한다. 이런 악행을 파해야 계근이 청정해진다.

둘째는 정(定)을 닦아서 모든 세간의 생사를 가져오는 삼매를 능히 끊는 것을 말한다. 생사에 얽매이게 하는 삼매로는 무신삼매(無身三昧) 내지 비상비비상삼매(非想非非想三昧) 등이 있다.

무신삼매는 공한 선정에 들어서 색(色)마저 멸해버려서 몸이 없다고 보는 삼매로,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뀐 마음을 내게 한다. 뒤바뀐 마음이란〔顚倒心〕 이 세상은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내가 있고〔我〕, 몸은 청정〔淨〕하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므로 이를 파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무변심삼매(無邊心三昧)는 무색계 식처정을 말하고, 정취삼매(淨聚三昧)는 무소유처정을 말한다. 세변삼매(世邊三昧)는 비상(非想)의 선정으로 이 선정에서는 팔만 겁을 능히 알기 때문에 세변이라 하고, 또한 비상이 삼계에 있음을 표시하므로 세변이라 한다는 것이다. 세단삼매(世斷三昧)란 팔만 겁 밖에는 알지 못하므로 곧 단(斷)이라 한다. 세성삼매(世性三昧)란 어둠의 시작〔冥初〕이 이 세상의 본성임을 말하며, 세장부삼매(世丈夫三昧)란 위뉴천(韋紐天, 비쉬뉘) 선정이다.비상비비상삼매란 존재하고 없어지는 것을 관하는 선정의 본체이다. 이런 선정들은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뀐 마음을 내어 세상을 열반이라 착각하게 하므로 이를 끊는 것이다.

셋째 지혜를 닦는다는 것은 세간의 잘못된 견해〔惡見〕를 파하는 것이다. 중생은 다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생사를 겪게 되니 모든 중생은 오온에 대하여 색(色)이 곧 나〔我〕이고 또한 나의 것이며, 색 가운데 내가 있고 내 가운데 색이 있다고 하며, 내지 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음으로는 상(常)의 입장에서 관하여 항상함이 곧 나이니 나의 오온에서 ‘색이 멸하지만 나는 존재한다’고 하거나, 색이 멸하면 나도 멸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만드는 자를〔作者〕를 나라고 하고, 받는 자〔受者〕를 색이라 하는 등 작자와 수자의 입장에서 사견에 집착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오대(五大)를 중생이라 하는 등 악견에 집착하여 이를 파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선근이 증장되는 삼학의 경우이다. 곧 계를 닦는 것은 몸의 고요함〔寂靜〕을 얻게 되고, 삼매(선정)를 닦는 것은 마음의 교요함을 얻기 위함이며, 지혜를 닦는 것은 의심을 파하기 위함이다. 의심을 파함은 도를 닦아 익히기 위함이고, 도를 닦음은 불성을 보기 위함이며, 불성을 보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함이며, 아뇩보리를 얻음은 위없는 대열반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열반을 얻음은 중생의 일체 생사와 일체 번뇌를 끊기 위함이고, 중생의 삼유(三有)를 끊고 중생의 모든 경계, 모든 진리를 끊기 위함이며, 이는 곧 부처님의 상·락·아·정을 얻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면 대열반이란 어떤 상태이고, 대열반을 얻기 위한 불성은 어떤 것인가.

중생의 이러한 악견과 집착은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변천하고, 인연 따라 멸하니 열반은 이와 같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생사의 인과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문들은 계와 정과 혜를 갖추어 닦고, 도는 팔정도이며, 사문의 과는 열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잘 살펴보면 열반의 인은 불성이고 불성의 자성은 열반을 내지 않으므로 열반은 인이 없다고 한다. 또한 열반의 인이 없으므로 과가 없지만, 능히 번뇌를 깨뜨리므로 대과(大果)라 한다. 이는 도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열반을 이루는 불성은 함께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각각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일 함께 가졌다면 한 사람이 아뇩보리를 얻을 때 모든 중생이 함께 얻어야 하고, 각각 가지고 있다면 그 불성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불성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모든 부처님께서 평등하고 허공과 같다고 하셨듯이 모든 중생이 공동으로 가졌으니, 만일 팔정도를 닦는 자라면 분명히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설산의 인욕초와 같아서 이 풀을 소가 먹으면 제호의 우유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불성은 하나인가 여럿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만일 이 불성이 하나라면 인욕초와 같이 소가 먹어버리면 끝나버리고, 여러 가지라면 어떻게 다 구족하게 닦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경에서는 비유를 들어서 불성과 성인의 도를 밝혔다.

“선남자여. 마치 평탄한 큰 길은 모든 중생이 모두 그 위로 다니고 장애할 것이 없으며, 중간에 나무가 있어서 그늘이 매우 시원하여 오고 가는 사람들이 수레를 멈추고 그 아래에서 쉬어가지만 그 나무 그늘은 항상 그곳에 있어서 옮겨가지 않고 없어지지 않으면서 없어지지도 않고 가지고 가는 이도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길은 성인의 도에 비유하고 그늘은 불성에 비유하였다. 우리는 성인의 도를 따라 닦아가면 다 한 가지로 불성의 그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육도로 나뉘어 한 둘이 아니다. 천인,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 등에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있어서 그들마다 불성이 있으니 불성이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열반경》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우유에 설탕을 넣으면 이후에 발효하여 만들어지는 타락, 숙소 내지 제호까지 모두 단맛이 있게 된다. 이 단맛의 성질은 제호에 직접 설탕을 넣은 것이 아니지만 우유 이후부터 이루어지는 타락, 숙소 내지 제호에 이르기까지 두루 들어 있어 단맛의 성질은 변하지 않으므로 설사 제호를 먹더라도 단맛은 남아있다. 비록 우유에서 타락, 숙소 내지 제호로 이름은 변하였지만 설탕은 그대로 있어서 단맛을 내게 된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우리 중생이 아무리 6도로 윤회하여 몸을 받더라도 불성은 항상 동일하여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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