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순, 김유신 도와 황산에서 백제 결사대 물리쳐
고구려 정벌 때도 출정…당에 다녀온 후 기록 전무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해(阿海)이다.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文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고, 또한 신기하며 기이한 일이 많았다.

서현(舒玄)의 아들이며, 유신(庾信)의 동생인 흠순은 ‘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세뇌된 것인지 아들보다 나라를 우선했다.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품일(品日)과 함께 김유신을 도와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황산(黃山)에서 결전을 벌인 적이 있다. 그냥 져도 큰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권력욕과 ‘가문의 영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오버를 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데, 흠순은 과감하게 아들을 죽인다. 아니 희생시킨다. 이름도 그렇고 그다지 쓸 만한 아들이 아니었던지, 아니면 엄청 말 안 들어 언젠가 집안에 누를 끼칠 것이라 걱정했는지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 노릇을 하자면 충(忠) 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자면 효(孝) 만한 것이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강요한다. 사가들은 조카까지 희생시키는 김유신의 가문을, 멸사봉공의 희생정신으로 일관해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지 모르나 그래도 아들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아버지로서 할 일이 아니다. 여하튼 엉겁결에 세뇌당한 것인지 반굴은 곧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영화 <황산벌>(2003)에서도 보았듯이 반굴이 죽자 이어 품일의 아들 관창(官昌, 官狀)도 싸우다 죽는다. 어쩌면 품일의 아들인 관창이 너무 뛰어난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반굴을 죽여서 관창도 죽게 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품일의 아들 자랑이 화를 산 것인지, 같이 일할 품일의 충성심을 보기 위한 반계(反計)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이때 품일도 흠순처럼 관창에게 “네가 비록 어리지만 의지와 기개가 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보지 않겠느냐?”고 강요했다. 관창은 주저하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들었지만, 곧바로 백제군에 붙잡혔고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관창이 계백의 아들도 아닌데 계백도 융통성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죽이기에는 어리고, 또 괜히 신라군의 동정심을 자극할 것이 걱정되었다면 사비성으로 보내면 될 일이다. 아니면 술 잔뜩 먹이고 기생들과 놀게 만들어 신라 장수와 군사들을 이간질해도 될 일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 든다고 여하튼 계백의 지혜도 여기서 끝장을 맞이했나 보다.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백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해 분하다.”며 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계백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관창의 머리를 벤 뒤 말 안장에 매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어린 화랑의 죽음을 본 신라군은 분노해 백제군 진영을 총공격했고, 결국 황산벌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한다.

사실 어린 관창이 죽었다고 해서 신라군이 화낼 일도 아니다. 전쟁통에 어른, 아이가 어디 있고 남녀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구실이 그렇다는 것이고, 신라 군사들은 흠순과 품일이 반굴과 관창을 보냈는데 자기들도 하나씩 보내 죽일 수 있다는 염려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신라 군사들에게 ‘어차피 죽은 목숨, 목숨 걸고 싸워야 그래도 살 가능성이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유도한 것은 아닐까? 여하튼 신라 병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김흠순은 668년 고구려 정벌 때 각간(角干)으로 김인문(金仁問)·천존·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출정하였다. 당나라와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669년에 파진찬(波珍飡) 양도와 같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670년 당나라에서 귀국했지만 그 뒤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당나라에서 고문을 많이 당했는지 마약 중독이 되었는지 뭔가 알 수 없는 잔혹사가 있었을 것 같다. 결국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말로가 아니었을까?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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