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승미 박사.
불교 교단은 사부대중, 즉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구성된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남성과 함께 교단의 일원으로서 그 지위를 당당히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단을 실질적으로 후원하고 사회적으로 불교신자로 활동해온 우바이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교단의 후원자이자, 수행자, 전법자로서 우바이의 역할을 살펴본 학술 연찬회가 열렸다.

불광연구원(이사장 지홍)은 ‘불교 발전을 이끈 우바이들의 삶과 신행’을 주제로 11월 24일 오후 2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제34차 학술연찬회’를 개최했다.

여성불자 모임인 불이회와 재단법인 보덕학회를 설립해 불교 발전에 기여한 실상화 윤용숙 보살 1주기를 맞아 열린 이번 학술연찬회에서는 실상화 보살의 전법행을 되짚어보고, 여성불자의 위상과 역할, 불교의 여성 담론, 근·현대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한 여성불자들의 삶과 신행 등을 조명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조승미 박사(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박사)가 빨리 문헌에 나타난 우바이들의 모습을 살펴본 ‘초기불교의 재가여성들 -후원자, 수행자, 전법자로서의 역할과 힘’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조 박사는 《앙굿따라 니까야》 <으뜸의 품>에 등장하는 10대 재가여성 중 교단 후원, 수행, 전법 분야에서 활약한 우바이 네 명을 고찰했다.

조 박사는 먼저 보시 제일 위사카(Visākhā)에 주목했다. 위사카는 붓다의 우바이 제자 중 교단을 보살피는데 최고라고 인정받은 이였다. 위사카는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와 함께 가장 열정적인 교단 후원자였다. 앙가(Aṅga)국 장자의 딸이었던 위사카는 일찍이 부처님의 교화로 수다원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위사카는 사왓티의 장자 미가라(Migāra)의 며느리로 시집갔는데, 결혼식 때 입은 장신구 옷을 교단에 보시해 유명한 녹모강당(鹿母講堂, Migāramātupāsāda)을 설립했다.

사원 건립 등 막강한 재정 후원 외에도 위사카의 보시행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위사카는 매일 집에서 2000명의 비구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그녀의 보시행은 승려 생활과 밀접해서 율장 《대품》에도 기록돼 있다. 승려에게 필요한 옷과 음식, 약품 등을 일생 동안 보시하겠다고 청을 올리는 내용이다.

위사카의 활동은 보시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승단에 문제가 있을 때 아나타삔디카와 함께 재가불자를 대표해 수습하곤 했다. 꼬삼비 사태 때 허물을 지적하며 화합하라는 한 당부를 비구들이 듣지 않자 홀로 안거에 들어간 부처님을 모셔온 것도 아나타삔디카와 위사카였다. 위사카는 임신한 줄 모르고 출가한 비구니의 임신 시기를 조사하는 등 부처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아 비구니 승단에서 일어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고, 재가여성들의 포살을 이끌기도 했다.

조 박사가 두 번째로 주목한 이는 선정 제일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와 난다마따 웰루깐다끼야(Nandamātā Velukandakiya)이다.

<으뜸의 품>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으뜸 제자가 차례대로 설명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선정 수행과 관련된 재가불자가 우바이에만 있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이것은 당시 우바이들이 선정 수행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며, 초기불교 재가신도의 수행을 조명하는데 있어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웃따라가 선정 제일로 언급된 것은 남편 시중을 들던 기녀 시리마가 질투심에 끼얹은 뜨거운 기름을 맞고도 그녀가 삼매의 신통력으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따라의 선정 수행이 자애삼매와 신통력이었다면 웰루깐다끼야는 자애삼매를 뛰어넘어 색계 사선정까지 도달해 재가자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불환과를 증득했다.

조 박사는 “(웃따라와 웰루깐다끼야처럼 우바이들이 선정 제일로 꼽힐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재가자, 나아가 여성의 깨달음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않았으며, 가르침을 제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우바이가 계율과 선정 수행을 기반으로 해 번뇌를 끊는 불교수행의 표준 형태를 준수했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라고 밝혔다.

조 박사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이는 다문 제일 쿳줏따라(Khujjuttarā)이다.

쿳줏따라는 우데나왕의 비 사마와띠의 시종이다. 쿳줏따라는 수마나라는 꽃장수가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을 돕다가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왕비 사마와띠가 자신도 불사의 감로수를 마시고 싶다고 법을 청하자, 법상에 앉아 왕비와 궁중의 500여인에게 법을 설했다. 사마와띠와 500여인은 쿳줏따라에게 설법을 듣고 수다원과에 이르렀다. 그들은 삼배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법문을 듣고 돌아와 그대로 들려주기를 청했는데, 쿳줏따라는 그 일을 반복하면서 어느덧 삼장을 외우고, 부처님으로부터 다문 제일로 인정받게 된다.

사마와띠와 500여인은 질투를 일으킨 다른 왕비 마간디야가 지른 불에 타 죽으면서도 자애삼매에 들어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조 박사는 “사마와띠와 500여인이 극악한 상황에서도 자애삼매에 들어 도과를 증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쿳줏따라의 전법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쿳줏따라는 단순히 법문을 듣고 전달하는 역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증득한 깨달음의 지혜를 고스란히 전달한 진정한 법사였다”고 강조했다.

조 박사는 끝으로 “초기불교의 우바이는 교단 후원자로서 영향력과 신통력으로 표현되는 선정 수행력, 전법가로서의 지도력을 모두 발휘했다”며, “후원자였던 우바이의 권한이 적지 않았던 것과 우바이의 뛰어난 수행력을 찬탄하고 격려하는 비구 지도자, 여성 전법 지도자에 대한 교단의 지원과 인정 등은 현대에도 시시하는 바 크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술연찬회에서는 조 박사 외에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가 ‘근·현대 여성불교 운동단체와 그 주역’을, 김호성 동국대 교수가 ‘실상화 윤용숙의 삶과 나눔불사’를, 옥복연 종교와젠더연구소 소장이 ‘한국 여성불자의 현실과 미래 전망’을 각각 주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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