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조(元朝)의 명차

원(元)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漢族)이 아닌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이 중원을 통일하여 세운 나라이다.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은 그 자체가 본래 중국 내지의 한족에 비해 그리 차를 즐기는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역대 중국 차 문화사를 논하는 자리에선 늘 건너뛰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실 차에 관한 기록이나 관련된 사료가 중국의 역대 다른 왕조들에 비해 가장 적은 왕조인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이다.

비록 몽고족 자체가 그리 차를 즐기는 민족은 아니었지만,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중원대륙을 지배했던 만큼 중국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문화의 계승·융합 차원에서 차 문화에 대해 아주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송나라 시대는 당(唐)나라를 이어 중국 문화의 최고 극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인 만큼 더욱 그러하였다.

실제로 여러 사료들을 보면, 원나라 때에도 이미 적지 않은 차가 명차(名茶)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또한 송나라를 이어 원나라 황궁(皇宮)으로 진공(進貢)되는 공차(貢茶) 제도가 여전히 시행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원나라 궁중 연회 때에도 차연(茶宴)이 거행된 것이 그림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원나라 때의 명차를 말하기 전에, 먼저 원나라 사람들이 차를 어떤 방법으로 마셨는지, 또 그때의 차는 크게 어떤 종류로 나누어졌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나라 때의 차(茶)와 차를 마시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명차(茗茶)’이고, 또 하나는 ‘점다(點茶)’이다. ‘명차’는 또한 ‘초차(草茶)’라고도 하는데, 이는 잎차를 우려 마시는 방법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때 사용되는 잎차를 통칭하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과 당나라 때 차를 끓여 마시는 전다법(煎茶法)을 절충, 변형된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찻잎을 작은 솥에 넣고 생수를 부은 다음, 다시 그 솥을 숯불 화로 위에 올려놓고 끓인다. 물이 막 끓기 시작하면 다시 찬물을 조금 부어 솥 안에서 끓어오른 찻물을 안정시킨다. 잠시 후 다시 끓으면, 또 다시 찬물을 조금 부어준다.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한 후, 차향이 온 방 가득 퍼지면 다동이 작은 국자로 다 끓인 찻물〔茶蕩〕을 떠서 찻잔에 옮겨 담아 손님에게 대접한다.

‘점다’는 가루차〔末茶 또는 抹茶〕라고 하며,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행하는 점다법(點茶法)과 동일하다. 우리나라에선 고려(高麗) 때 한창 유행되었던 음차방식이다. 요즘 우리나라 다도계(茶道界)의 많은 다인들 사이에서도 이 방법이 한창 유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차문화(茶文化) 행사의 찻자리〔茶席〕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 두 가지의 음차방식이 모두 공존하긴 했으나 주로 ‘명차’의 전다법을 주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명차’란 차싹〔茶芽〕과 찻잎〔茶葉〕을 의미한다.

원나라 마단임(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명차의 품목 51종이 기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두금(頭金), 골금(骨金), 차골(次骨), 말골(末骨), 조골(粗骨) 등은 송대의 건주(建州)1)와 검주(劍州)2)에서 생산되었다.

니편(泥片)은 건주(虔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강서성(江西省) 감현(竷縣)이다.

녹영금편(綠英金片)은 원주(袁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강서성 의춘시(宜春市)이다.

조춘(早春), 화영(華英), 내천(來泉), 승금(勝金) 등은 흡주(歙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3)이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그 유명한 10대 차 중의 하나인 ‘황산모봉(黃山毛峰)’과 ‘휘주공국(徽州貢菊)’, 그리고 ‘황산녹목단(黃山綠牧丹)’의 주요 생산지 중의 하나이다.

독행(獨行), 영초(靈草), 녹아(綠芽), 편금(片金), 금명(金茗) 등은 담주(潭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남성(湖南省)4)이다.

대탁침(大拓枕)은 강릉(江陵)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북성(湖北省) 강릉현이다.

대파릉(大巴陵), 소파릉(小巴陵), 개승(開勝), 개권(開卷), 소개권(小開卷), 생황령모(生黃翎毛) 등은 악주(嶽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남성의 악양시(嶽陽市)5)이다.

쌍정녹아(雙井綠芽), 소대방(小大方)은 풍주(灃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남성의 풍읍(灃邑)이다.

동수(東首), 천산(淺山), 박측(薄側) 등은 광주(光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하남성 황천현(潢川縣)이다.

청구(淸口)는 귀주(歸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북성 자귀현(秭歸縣)이다.

우전(雨前), 우후(雨後), 양매(楊梅), 초자(草子), 악록(嶽麓) 등은 형호(荊湖)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북성 무창(武昌)에서 호남성 장사까지 이르는 일대이다.

도유(都濡), 고주(高株) 등은 완주(阮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호남성 검양(黔陽), 원릉(沅陵), 진계(辰溪) 일대이다.

용계(龍溪), 차호(次號), 말호(末號), 태호차(太湖茶) 등은 회남(淮南)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양주(揚州)에서 합비(合肥)에 이르는 일대이다. 이 차들은 모두 산차(散茶)이다.

명자(茗子)는 강남(江南)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강소성 강녕(江寧)에서부터 강서성 남창(南昌)까지 이르는 일대이다.

선지(仙芝), 눈예(嫩蕊), 복합(福合), 녹합(祿合), 운합(運合), 경합(慶合), 지합(指合) 등은 지주(池州)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 안휘성의 귀지(貴池) 및 청양(靑陽), 동지(東至), 석대(石台) 등이다.

무이차(武夷茶)의 생산지는 무이산(武夷山) 일대이며, 지금의 복건성 무이산시(武夷山市)이다. 지금도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무이차는 현재 ‘무이암차(武夷岩茶)’로 통칭되고 있으며, 그 유명한 대홍포(大紅袍)6)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양선차(陽羨茶)는 상주(常州) 의흥현(宜興縣)에서 생산되었으며,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의흥시(宜興市)7)이다. 의흥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자사호(紫沙壺)의 본고장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의흥자사호(宜興紫砂壺)의 창제는 중국차문화사에 있어서 다기(茶器)의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원나라 때에도 송나라 때의 공차제도가 여전히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명차(名茶) 또한 꾸준하게 생산됐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또한 다른 왕조에 비해 결코 크게 뒤떨어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북방 이민족인 몽골족이 중원의 한족에 비해 차를 크게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원의 한족의 문화를 완전히 등한시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예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위의《문헌통고》와 기타 사료에 보이는 명차(名茶)의 이름들은 하나같이 희귀하고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은 그 명성이 현대에까지 전해지고, 또 제다법이 잘 보존되고 계승․발전되어우리들에게 낯익은 이름들도 보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글을 쓰는 필자 본인도 너무 생소하여 이것이 도대체 차 이름이 맞는가 할 정도로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고찰해보고 싶다. 물론 이는 필자 개인의 몫이 아니라 차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수많은 다인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주) -----
1) 현재, 복건성(福建省) 건구현(建甌縣)이다.
2) 송조(宋朝) 복건성의 남검주(南劍州)이며, 현재 복건성의 남평시(南平市)이다.
3) 흡현(歙縣) : 현재, 안휘성 황산(黃山)시에 속해 있다. 진(秦)나라 때 흡현을 설치하였고, 수나라 때 흡주로 승격하였다. 송나라 휘종 때 휘주(徽州)로 개명하였다. 이후 흡현은 휘주에 소속된 가장 큰 현(縣)이며, 휘주는 지금의 황산시(黃山市)이다. 현재 안휘성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유명한 황산(黃山)이 있고, 동쪽으로는 항주(杭州)와 이웃하고 있는 현(縣)급 도시이다.
4) 장사(長沙) : 옛날의 명칭은 ‘담주(潭州)’이다. 호남성의 수도(省都)이다.
5) 악양(嶽陽) : 중국 호남성의 지급시(地級市)이다. 당대(唐代)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등악양루(登嶽陽樓)》란 시를 비롯해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모여 수많은 시를 남겼다는 그 유명한 ‘악양루(嶽陽樓)’가 있는 도시이다.
6) 대홍포(大紅袍)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이완(臺灣) 오룡차의 원조(元祖)이기도 하다.
7) 의흥(宜興) : 의흥의 지명은 송대 이전에는 원래 의흥(義興)이었으나, 송나라 태종 조광의(趙匡義)의 휘(諱 : 황제의 이름)를 피해 의흥(宜興)으로 개칭되었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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