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선정됐습니다. 작품 목록을 보다가 놀랐습니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동일한 제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영화의 원작자였습니다. <남아있는 나날>은 20년도 더 전에 봤는데, 당시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영국, 1993)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면, 주인공 캐릭터가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는 ‘위대한 집사’라는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생애를 수도 하듯 그렇게 자신을 담금질하는 캐릭터인데, 그런 가운데 드러나는 인간적 약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한 인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인생에서 놓친 것을 깨닫고서 보여주는 다음 행동도 그다우면서도 수긍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실감나는 캐릭터가 가능한 것은, 안소니 홉킨스의 뛰어난 연기력이 스티븐스라는 인물을 잘 살린 것도 이유겠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원작자의 역량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30년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달링턴 홀은 국제대회가 자주 열리는, 세계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이 달링턴 홀의 집사입니다. 그는 유능한 집사였습니다. 주인인 달링턴 경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그 또한 주인에게 절대적 복종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일처리 또한 완벽했습니다. 주인이 아침에 보는 조간신문은 직접 다림질해서 주었으며, 하인들 간에 연애 하느라 일이 흐트러지는 걸 경계해서 예쁜 여자는 절대로 채용하지 않았으며, 근거리에서 만찬을 시중들지만 주인의 대화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저 집사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스티븐스의 아버지 또한 집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주방에서 하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위대한 집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인도의 어떤 귀족가문 집사를 예로 들면서 아버지가 말한 좋은 집사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스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런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말한 위대한 집사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자기 하던 일을 묵묵하게 했습니다. 만찬에 참석한 손님 중 발이 아픈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족욕을 시키느라 스티븐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인간적 감정보다 집사의 직무에 더 충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절제하면서 살아온 스티븐스에게 새로 온 하녀장 켄튼(엠마 톰슨)은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도 모르게 켄튼의 총명함과 당당함에 매료됐습니다. 방문에 달린 둥근 창문을 통해 켄튼의 동선을 파악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둘 만의 회의를 가장 즐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능한 집사답게 그 시간도 사적인 대화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집사와 하녀장으로서 업무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하녀장 켄튼이 먼저 스티븐스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녀는 정원에서 꽃을 꺾어 스티븐스의 개인 집무실에 가져갔습니다. 틈만 나면 새로운 꽃을 꺾어 스티븐스에게 가져갔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켄튼이 스티븐스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스티븐스가 책을 읽고 있다가 켄튼에게 한사코 책을 숨기려 했습니다. 저돌적이고 당찬 켄튼은 기어코 스티븐스로부터 책을 빼앗았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연애소설이었습니다. 당황한 스티븐스는 궁색한 변명을 했습니다.

“주인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나 눈치 빠른 켄튼은 스티븐스의 마음을 알아챘습니다. 자신도 스티븐스를 좋아하고, 스티븐스도 그러하니 어려울 것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은 이미 들통 났지만 결코 스티븐스는 그 감정을 인정하려 않았습니다.

켄튼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업무와 관련한 말만 했습니다. 이런 스티븐스의 완고한 태도에 지친 켄튼이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한다고 할 때도 스티븐스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잘 다녀오라고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창문으로 켄튼이 나가는 장면을 몰래 숨어서 봤습니다. 그의 행동과 마음이 완전히 다른 것이고, 그가 자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켄튼은 다른 남자와 떠났습니다. 결국 스티븐스는 자신의 감정 보다는 업무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본성 보다 이성을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이성을 따르는 삶은 대체적으로 평탄한 편입니다. 특별하게 행복하진 않지만 특별하게 불행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켄튼이 떠나고도 달링턴 홀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편 20여년 후 스티븐스를 다시 만난 켄튼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스티븐스를 좋아했는데, 분명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스티븐스의 완고함에 지치고 또 화가 나서 스티븐스를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서부로 떠나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행동했고 그 결과는 불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남편과 불화를 겪다가 마침내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후 이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이성적 삶을 선택했던 스티븐스와 감정적 선택을 했던 켄튼, 이들은 둘 다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다. 스티븐스는 개인적 감정을 억누르면서 살아왔기에 마음 한편에는 켄튼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던 것이고, 켄튼은 자신의 감정적 선택으로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기에 다시 달링턴홀로 돌아가 평온한 날을 보내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티븐스는 이 재회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새 주인과 함께 시작할 달링턴 홀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았고, 켄튼은 달링턴 홀로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딸이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도와줘야 한다는 이유로 다시 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쉬운 이별을 했습니다.

달링턴 홀로, 원래 위치로 돌아온 스티븐스와 새 주인인 루이스가 집을 둘러보고 있을 때 비둘기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스티븐스는 그의 아버지가 얘기했던 인도 저택의 호랑이 이야기처럼 침착하게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스티븐스의 마음 한 쪽을 차지하고 있던 감정의 영역인 켄튼에 대한 사랑, 개인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35년을 달링턴 홀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스티븐스는 마침내 그 욕망을 날려 보낸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갈등은 없습니다. 그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주인에게 충성하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달링턴 홀은 영국인 주인에서 미국인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미국인 주인 루이스는 달링턴 경과 달리 젊고 자신감이 넘치며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집을 사자마자 스티븐스에게 고급 포드 승용차를 내주며 여행을 종용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합리성, 그리고 자유를 중요한 가치 덕목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가 스티븐스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주인이 격식을 중요시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서재 장면처럼 이념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그 주인처럼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제 스티븐스는 다른 주인의 가치관을 추종하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행에서 스티븐스는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삶이 치명적 약점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스티븐스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앞으로 새로운 주인을 어떻게 모셔할 할 것인가에 삶의 주안점을 둘 뿐이었습니다.

사실 여행에서 스티븐스는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고급 승용차에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은 스티븐스를 보고 시골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인물로 여겼으며, 그들의 부추김에 으쓱해진 것인지 스티븐스는 달링턴 홀을 찾았던 유명인사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의 하인이라는 것을 알아챘으며, 그리고 그가 모셨던 주인은 친 나치주의자로 낙인찍힌 인물이기에 스티븐스 또한 나치 부역자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 말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하는 일엔 관여하지 않았으며 그저 자신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나치 부역자라는 오명을 쓰게 됐고, 켄튼은 불행한 결혼 생활로 오랜 시간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삶은 완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든 실수가 있을 수 있고 후회가 남기 마련입니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삶은 다른 쪽에서 결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것에 대한 미련이 남기 마련인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균형 있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삶과 일을 균형 있게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위대한 집사는 되기 어려웠겠지요. 그가 꿈꿨던 위대한 집사라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그저 하인에 지나지 않고, 주인의 평판에 따라 나치 부역자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찮은 목표에 자신의 삶을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에게는 이런저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 하고 궁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위대한 집사가 돼서 주인을 완벽하게 모시고, 달링턴 홀이 완벽하게 굴러 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을 만나 은근히 모욕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뼛속까지 집사였습니다.

무문 혜개 스님의 공안집 《무문관》에 ‘백장과 들여우’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백장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여우 몸을 벗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우 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찾아낸 답은, 여우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 때 여우라는 생각도, 여우 몸을 벗는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여우 몸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스티븐스의 집사로서의 삶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철저한 삶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늘로 날아간 비둘기처럼 자신을 어떤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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