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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초기불교의 최고 성인 ④
아라한은 가장 적극적인 사회 참여 실천자
2017년 12월 04일 (월) 17:20:01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아라한은 개인적이고 자리(自利)적인 수행자상이라는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성도한 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60명이라는 조직적인 전도단(傳道團)을 결성하여 각지로 파견했을 때 그 구성원은 바로 아라한이었다. 유명한 ‘전도(傳道) 선언’ 또는 ‘전법(傳法) 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 인간 사회(manussā)와 신성(神性 : dibbā)으로부터의 ― 모든 질곡(桎梏)과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또한 나와 같이 모든 질곡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이제 ‘인간과 신들(devamanussā)’의 이익(attha)을 위해 ‘세계에 대한 큰 자비심(lokānukampa)’을 가지고 ‘많은 종류의 대중의 복지(bahujana-hita)’와 ‘많은 부류의 대중의 행복(bahujana-sukha)’을 위해 널리 돌아다녀라. 그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조리 있고 적절한 표현으로 법을 잘 설하라. 그리고 안팎(내용과 형식)에 있어 무엇이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와 삶의 완성인지를 보여주고 설명하라. 중생(sattā) 가운데는 아직 때 묻지 않아 법을 알아들을 사람도 많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구제 받지 못하고 퇴보할 것이다. 그러나 법을 들으면 곧 이해하고 깨달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갈 것이다.

이같이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아라한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펼쳐진 대 사회적 교화 활동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운동의 핵심으로서 불교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개개인과 사회의 성중화(聖衆化)를 위한 가장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대사회적 운동이다. 따라서 아라한은 가장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실천자로, 자리(自利)적이기만 하고 이타(利他)적이지 않았다는 인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 10대 아라한 가운데 한 명인 부르나(富樓那) 존자는 죽음을 각오한 사회적 실천 운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경전에는 현재 뭄바이(Mumbai, 과거의 Bombay) 소빠라(Sopārā) 지역의 포학한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부르나 존자와 스승인 부처님 사이에 오간 대화가 전한다.

“그곳 사람은 거칠고 사납고 비난하고 욕을 잘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손이나 돌을 사용해 때리지 않으니 그 곳 사람은 어질고 착하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손이나 돌을 사용하여 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곳 사람이 어질고 착하고 지혜가 있어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칼이나 몽둥이를 사용하여 해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곳 사람은 어질고 착하고 지혜가 있어 죽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칼이나 몽둥이를 사용하여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곳 사람은 어질고 착하고 지혜가 있어 썩어 무너질 몸을 해탈하게 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아라한은 지극한 대자비심의 화현 그 자체로 나타난다. 중생 구제의 선두에 서서 쉬지 않고 끊임없이 유행하는 최고의 이타적이고 박애적인 성인상이며 수행자상이다. 후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구제에만 몰두하고 이타적인 데에는 전혀 관심 없는 매우 이기적인 수행자상과는 다르다.

인도불교를 크게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기준은 대승불교가 일어난 시기로 그 이전을 소승불교라 한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는 아라한과는 다른 ‘보살(菩薩)’이라는 수행자상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전의 아라한을 성문승(聲聞乘)이라 하여 비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의 3승(乘) 가운데 성문과 연각의 2승(二乘)과 보살을 구별한다. 그리고 성문승은 아라한의 경지를 이루는 것을, 연각승은 연기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자리(自利)에 치중한 반면에, 보살승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추구해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한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특정한 아라한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성문승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승불교가 흥기할 즈음에 사원 중심의 이기적인 행태에 빠져 있던 출가승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승불교 흥기 당시에 중생 교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교학적인 체계를 세우는데 급급했던 부파불교 논사 또는 수행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래서 현대 불교학에서 ‘소극적 출가 중심주의적인 성문승가’라는 말을 곧잘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있어 아라한은 대승불교의 보살 못지않게 대사회적인 이타적 실천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자리(自利) 중심의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수행자상이 아니다. 하지만 대승불교 흥기 시점에서 초기·부파불교 수행자는 대승불교가 소승이라고 지칭할 만큼, 다분히 자리(自利)적이고 폐쇄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대승경전에서 아라한의 성문승(聲聞乘)은 소승으로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명한 대승경전인 《법화경》이다. 일불승(一佛乘)을 강조하는 《법화경》에서는 아라한인 사리불을 등장시켜 스스로 자신의 경지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고백시키고 있다. 다시 마하가전연과 마하가섭, 마하목건련과 같은 또 다른 아라한까지 등장시켜 스스로 그들의 불완전한 경지를 고백하게끔 한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유명한 대승경전인 《유마경》에서는 모든 성문이 해탈 법문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대가섭은 사리불에게 마치 장님이 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자신이 대승불교에 있어 패종(敗種)과 같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기술은 초기불교의 아라한관에 비추어 볼 때 최악의 아라한격 실추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는 또 이전의 아라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에서 아라한은 무여열반(無餘涅槃), 곧 회신멸지(灰身滅智)의 경지에 이른 이를 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아라한이 이른 궁극적인 경지가 육신을 재로 만들고 지혜마저 소멸한 상태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승불교의 비판은 사실 초기불교에서 상주론(常住論)과 함께 비판한 단멸론(斷滅論)에 대한 비판에 다름이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공무(空無)를 말하는 외도의 허무단멸론을 비판한 것을 대승불교는 다시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초기불교에서 아라한 경지에 대한 설명은 오해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아라한은 사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윤회를 벗어난 존재라는 표현 등이 이미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초기불교는 이미 이러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열반을 언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의 경계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세계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다.

불교가 출발할 때 아라한 경지는 불교수행의 최고 목표이었다. 그것은 일체 번뇌를 끊어 열반의 경지를 성취하고 생사윤회의 세계에 더 이상 나지 않는다는 설명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한은 근기가 낮은 소승이나 추구하는 성자로 낮추어 보고 멸시하는 풍토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풍토는 후대 불교가 본래의 중생 교화 정신을 잃고 오로지 현학적인 학문 불교로 전락할 때 나타난 최고 수행자상에 대한 왜곡된 아라한관(阿羅漢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의 보살정신과 대비되면서 왜곡이 더욱 심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한은 본래 대단히 이타적인 실천하는 수행자상 그 자체였다. 따라서 앞으로 불교 최고의 수행자상인 아라한 이해를 좀 더 심도 있게 재검토할 필요가 절실하다 하겠다. 그렇게 될 때 역사적인 부처님이었던 석가모니가 근본적으로 강조하려 했던 아라한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을 참되게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는 대·소승 개념을 초월한 불교를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대승불교의 아라한관은 신중히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에서 그들을 하열한 소승불교라고 싸잡아 폄하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불교도가 동남아 등지에 가서 그곳 불교도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소승불교라고 칭하는 실례를 범하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폄하하는 의미의 소승불교는 시대적인 구호였으며 일방적인 면이 없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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