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은 계(戒)·정(定)·혜(慧)를 닦는 것이다. 계는 승가의 모든 규율과 지켜야 할 도리이고, 정은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 선정이며, 혜는 제법의 진리를 아는 지혜이다. 계로 악업을 짓지 않고 덕행을 실천하게 하게 하고, 정으로 마음의 동요를 그치고 평안한 경지를 얻게 하고, 혜로써 어리석음을 막고 진리를 바로 알게 한다. 수행자는 이 세 가지를 배우므로 삼학(三學)이라 한다.

《열반경》에서는 삼학의 수도(修道)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구들이 만약 계와 정과 지혜를 닦으면 퇴전하지 않고 대열반에 친근하게 되리라.”

삼학은 이와 같이 수행자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세 가지 덕목으로, 불도에 들려면 계근(戒根)을 청정히 하고, 정근(定根)을 청정히 하며, 혜근(慧根)을 청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삼업을 청정히 하는데 기준이 되는 바른 계·정·혜의 진위(眞僞)를 밝히고 있다.

먼저, 계란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은 생기지 않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을 생기게 하며, 이미 생긴 악을 방지하고 선을 더욱 증장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양(利養)을 바라고 계를 수지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고 여래를 보지 못하며, 비록 불성과 여래의 이름을 듣더라도 오히려 불성과 여래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정법을 위하여 금계(禁戒)를 잘 수지하면 이 계로써 항상 불성을 보고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를 받아 지니더라도 다만 자신의 몸만을 위하여 인간에 나거나 천상에서 쾌락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 일체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는 경우, 위 없는 정법을 보호하지도 않는 경우는 바른 계율을 지니고 닦는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이양을 위하여 삼악도를 두려워하여 계를 지키고, 수명과 사대로 이루어진 색신과 기력과 편안함과 걸림 없는 변재를 위하여 계를 지키며, 국법과 나쁜 명성과 나쁜 소문이 두려워 세간 사업을 영위한다면 이런 사람은 진실한 계를 닦는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실한 계를 수지는 방법은 무엇인가.

계율을 받아 지닐 때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정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도되지 못한 자를 제도하기 위하여, 불법을 알지 못하는 이를 불법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귀의하지 않은 자를 귀의하고도록, 열반에 들지 못한 이를 열반에 들게 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계를 잘 지니는 것이 된다. 또한 수행자가 계를 닦으면서도 계에 집착하지 않고, 낱낱의 계의 조목에 집착하지 않고, 계를 수지하는 사람도 보지 않고, 계의 과보도 보지 않고, 파계하는 것에 관심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계를 잘 닦는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선정을 닦는 모습을 보면 선정을 잘 닦아야 삼매에 잘 들어갈 수 있고, 삼매에 들어가야 번뇌를 잘 끊을 수 있어서 선정 삼매는 마음 공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대승보살들은 어떻게 삼매를 닦아야 하는가.

삼매를 닦을 때 스스로 해탈하기 위하거나 이양만을 위할 뿐, 다른 중생을 위하지 않고, 법을 위하지도 않으며, 탐욕과 더러운 음식 등의 허물과 남녀 등의 아홉 구멍에서 부정한 것과 소송을 다투는 일, 때리고 서로 살해한 것 등의 일을 보기 위해 닦는 것은 잘못된 수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삼매 닦는 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중생을 위하여 삼매를 닦으며, 중생 속에서 평등심을 얻기 위하여 닦으며, 중생들이 퇴전하지 않는 법을 얻게 하기 위하여 닦으며, 중생으로 하여금 성인의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을 얻게 하기 위하여, 위없는 법을 지키기 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삼매와 다라니를 얻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사무애(四無碍)를 얻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기 위하여 삼매를 닦는다. 또한 수행할 때 삼매를 보지 않고 삼매라는 모양을 보지 않으며, 닦는 사람을 보지 않으며, 과보도 보지 않을 때 진실한 삼매 닦는 법이라고 한다.

다음은 지혜를 닦는 법이다. 보살이 선정삼매를 얻고 이제 지혜로 제법을 비추어 보아 번뇌를 파하고 불도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지혜의 경계가 있다. 일체지(一切智)는 일체법을 아는 지혜, 공지(空智)라고도 한다. 도종지(道種智)는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말하는 지혜, 가지(假智)라고 한다.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일체를 자세히 꿰뚫어 아는 지혜로 중도제일의제의 지혜를 말한다. 일체종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갖춘 지혜이다. 자연지(自然智)란 인위적으로 증득하여 취한 것이 아닌 저절로 존재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 ‘무사지(無師智)’는 남에게 배워 깨닫지 않은 지혜이다. 가장 원만한 지혜를 천태학에서는 삼지일심(三智一心)이라 한다. 삼지일심이란 일체지, 도종지, 일체종지를 일심 속에서 깨달아 삼관(공관, 가관, 중관)을 일심 속에서 원융하므로 원만하게 일체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지혜를 닦으면 해탈을 얻어 삼악도에서 벗어나니 누가 능히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누가 능히 생사하는 악취에서 사람을 제도하는가. 부처님 출현하기가 우담발화가 한 번 피는 것처럼 어려우니 내가 생사의 결박을 끊고 해탈을 얻겠다고 하는 이는 지혜를 닦는다고 하지 못한다.

진실된 지혜를 닦는 이는 나고 죽는 생사의 고통을 관하되 중생이 무명에 덮여서 위 없는 도를 닦을 줄 모르니 나의 이 몸으로 중생을 대신하여 이 큰 고통 받기 원한다. 또한 중생의 빈궁함, 미천함, 파계하는 마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죄업이 모두 다 나에게 모이기를 서원하며, 중생들이 탐욕으로 취하지 않고, 명과 색에 속박되지 않음을 원하며, 중생들이 하루빨리 생사에서 벗어나고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서 결코 싫어하지 않고 원하며, 모든 사람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기를 원한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닦을 때 지혜를 보지 않으며, 지혜의 모양을 보지 않으며, 닦는 이도 보지 않고, 과보도 보지 않으면 이를 진실한 지혜를 닦는 수행이라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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