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화가의 마음을 투영한다. 화가의 시선에 의해 보아지고, 느껴지고, 생각된 이합집산들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낸다. 밀레에 의해 비추어진 한산한 노을 풍경도, 뭉크의 시각에서는 생명의 태양이 져버리고 시작되는 어둠이라는 불안한 죽음에의 암시로 뒤바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루어 본다면 필시 환희로운 부처님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속에는 빛을 발하는 부처님이 깃들어 있으리라.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 이곳에는 대나무처럼 30여 년 남짓 변함없이 불화의 외길을 걸어온 고영을(52·사진) 화가가 살고 있다. 10여 년 전 한국화 원로작가 한 분이 직접 지어준 ‘심향실(心香室)’이라는 작업 공간에 뿌리를 내린 채, 일심(一心)으로 정성을 다 쏟으며 불화를 그려내고 있다. 지금은 ‘전통 불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그이지만, 서양화가로 불화 그리기를 시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서양화를 전공한 제가 불화 그리겠다고 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대했죠. 그들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 시절 미술 교사를 하며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던 고 화백에게는 서양화의 한계에 대한 염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우연히 접한 『반야심경』에서 그동안 보아왔던 어떤 철학에서도 해결치 못했던 ‘결론’을 찾게 되었다. “왜 불교를 몰랐을까”하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탱화장 구봉(龜峯, 1910∼1998) 스님께 불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은사이신 구봉 스님께선 육체적으로 귀와 입의 문이 닫혀있었지만, 오로지 부처님의 마음이 되어 탱화를 그리시던 천진불이셨습니다. 처음 탱화를 배우면서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그렸습니다. 『법화경』이 뭔지, ‘영산회상도’가 뭔지 하나도 몰랐고, 자연스럽고 하늘하늘한 옷자락의 흐름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30여 년 남짓 세월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고 화백은 생활 속의 소재와 주제를 첨가해 그만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을 지키면서도 시대상을 담는 증거물로써의 불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미술대 출신 가운데 불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늘었고, 시선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동안 인내하며 걸어온 당연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고 화백의 손길이 닿은 불화들도 탄생했다. 파리 길상사, 남원 실상사, 광주 증심사, 목포 약사사, 광주 문빈정사, 곡성 성륜사 등의 사찰은 물론 서울 금호미술관에도 ‘16관경 변상도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1999년 성륜사 대웅전 외벽에 그림을 그렸을 때는, 청화 스님이 불화를 보고 “극락에 다녀온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고 화백은 전통적인 도상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전통 불화와 더불어 선화 속에 드러난 독도와 금강산을 그려냈고 5·18 민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을 담아낸 작품들도 선보였다.

“생활 법문 자체가 불법이지 않습니까. 스님들을 뵙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친구들을 만나며, 하늘을 쳐다보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어디서 영감을 따로 받고 생각을 특히 깊게 해야 할 것이 없는, 생활 자체가 불법이라는 생각에 일상의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그림에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주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도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불화 화가로서의 엄격한 선이 있다. 그는 옛날 것만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결코 전통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불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에 내려온 초를 그대로 그린다 해도 의미가 있지만, ‘전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우리의 것이 되도록 만들면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곧 새로운 전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곡성 성륜사 외벽 벽화를 그리면서 서양화에서만 볼 것 같았던 아크릴 물감으로 전통적 색과 기법을 적용시켜 벽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절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탱화를 그립니다. 문상중학교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새벽에 붓을 잡을 때면 항상 불화의 전통을 잇고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새로운 전진을 꿈꾸고 있습니다. 불심으로 그리는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이 모든 이들에게 자비로운 부처님의 말씀으로 다가가길 바랄 뿐이죠.”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로 보이지만,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도 사바세계로 보인다고 했다. 고 화백이 불심으로 그리는 불화는 분명 부처님의 모습과 함께 그 마음까지도 담아내고 있을 것 같다. 그런 고 화백은 요즘 불화 그리는 일에 몰두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고 한다. 물론 불화 그리는 일은 항상 그에게 기쁨이고 부담이지만, 어떤 그림이든 그릴 기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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