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작가의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仙鶴洞) 나그네>는 ‘남도 사람’ 연작에 포함된 작품들로서 흔히 <서편제> 3부작이라고 불린다. 눈 먼 소리꾼 여자와 그녀의 오라비의 이야기를 담도 있는 이 작품들은 임권택 감독이 두 편(<서편제>와 <천년학>)에 걸쳐 영화화하기도 했다.

<서편제>에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소리꾼과 그의 눈 먼 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화자(話者)는 소릿재 주막을 지키고 있는 여자이고, 청자(聽者)는 소릿재 주막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연을 지닌 사내이다. 사내가 여자에게 소리의 내력을 묻는다. 여자의 얘기인즉슨 이러하다.

여자가 아직 잔심부름꾼 노릇으로 끼니를 벌고 있던 읍내 마을의 한 대갓집 사랑채에 이상한 식객 두 사람이 들게 되었다. 나이 이미 쉰 고개를 넘은 늙은 아비와 열다섯이 될까 말까 한 어린 딸아이, 소리꾼 부녀였다. 부녀는 가을 한철을 하염없이 소리만 하고 지냈다. 그러다 겨울이 닥쳐오자 아비의 기침소리가 발작기로 변해갔다. 그런데도 아비는 웬일인지 한사코 집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부녀는 공동묘지 길 아래 버려진 헛간 같은 빈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해 겨울도 다해 가던 음력 세모께의 새벽녘, 아비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리를 하고 나서 피를 토하며 가쁜 숨을 거뒀다.

사내는 여자의 얘기를 들은 뒤 회상에 잠긴다.

파도 비늘이 반짝이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변가 언덕 밭의 한 모퉁이 - 그 언덕 밭 한 모퉁이에는 누군가 주인을 알 수 없는 해묵은 무덤이 하나 누워 있었고 소년은 언제나 그 무덤가 잔디밭에 허리 고삐가 매여져 지내고 있었다. 동백나무 숲가로 뻗어 나온 그 기다란 언덕 밭은 소년의 죽은 아비가 그의 젊은 아낙에게 남기고 간 거의 유일한 유산이었다. 소년의 어미는 해마다 그 밭뙈기 농사를 거두는 일 한 가지로 여름 한 철을 고스란히 넘겨 보내곤 했다.

소년은 날마다 그 무덤가 잔디에서 고삐가 매인 짐승 꼴로 긴긴 여름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언덕바지 무덤가에서 소년은 더러 물비늘 반짝이며 섬 기슭을 돌아나가는 돛단배를 내려다보기도 했고, 더러는 또 얼굴을 져오는 듯한 여름 태양 볕 아래 배고픈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나저제나 밭고랑 사이로 들어간 어미가 일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여름마다 콩이 아니면 콩과 수수를 함께 섞어 심은 밭고랑 사이를 타고 들어간 어머니는 소년의 그런 기다림 따위는 아랑곳을 하지 않았다. 물결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가물가물 콩밭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하루 종일 그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은 이상스런 콧소리 같은 것을 웅웅거리고 있었다. 어미의 웅웅거리는 노랫가락 소리만이 진종일 소년의 곁을 서서히 멀어져 갔다간 다시 가까워져 오고, 가까워졌다간 어느 틈엔가 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가곤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뙈기밭 가로 해서 뒷산을 넘어가는 고갯길 근처에서 이상스런 노랫가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밭두렁 길을 지나 뒷산으로 들어가는 푸나무꾼 같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던 소리였다. 하지만 그날의 노랫가락은 동네 나무꾼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산으로 들어간 나무꾼도 없었고 소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산을 휩싸고 있는 녹음 속 어디선가 하루 종일 노랫소리만 들려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것은 이 날 처음으로 그 산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오던 어떤 낯선 노래꾼의 소리였다. 어쨌거나 그 날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노랫소리는 진종일 해가 지나도록 숲 속을 흘러 나왔고, 그러자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이 일어났다. 밭고랑만 들어서면 우우우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던 어미의 그 이상스런 웅얼거림이 이날 따 그 산소리에 화답이라도 보내듯 더욱더 분명하고 극성스럽게 떠돌아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어미는 뜨거운 햇볕 아래 하루 종일 가물가물 밭이랑 사이를 가고 또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산봉우리 너머로 뉘엿뉘엿 햇덩이가 떨어지고, 거뭇한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산기슭을 덮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진종일 녹음 속에서만 숨어 있던 노랫소리가 비로소 뱀처럼 은밀스럽게 산 어스름을 타고 내려와선, 그 뱀이 먹이를 덮치듯이 아직도 가물가물 밭고랑 사이를 떠돌던 소년의 어미를 후닥닥 덮쳐 버린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그날의 소리는 아주 소년의 마을로 들어와 집 문간방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으며, 동내 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게 된 소리의 남자는 날만 밝으면 언제나 그 언덕 밭 뒷산의 녹음 속으로 숨어 들어가 진종일 지겹도록 산울림만 지어내리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녹음이 소리를 숨기고 사는 약한 소리였다. 밭고랑 사이를 오가는 여인의 그 괴상스런 노랫가락소리도 날이 갈수록 점점 극성스러워지고만 있었다. 소년은 여전히 그 무덤가 잔디에서 진종일 계속되는 노랫가락소리를 들어야 했고,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에 지친 잠을 자거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잠을 다시 깨어야만 했다. 잠을 자거나 잠을 깨거나 소년의 귓가에선 노랫소리가 떠돌고 있었고,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가 걸려 있었다.

소리의 얼굴이 없었으되, 소년의 기억 속엔 그 머리 위에 이글거리던 햇덩이보다도 분명한 소리의 얼굴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야말로 그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해매 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소년이 그 소리의 진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은 그의 어미가 어느 날 밤 뜻하지 않은 소동 끝에 홀연 저승길로 떠나가 버리던 다음 날 아침의 일이었다. 소리가 마을을 들어서던 그 한여름이 지나고 해가 훌쩍 뒤바뀌고 난 이듬해 이른 여름의 어느 날 밤, 소년의 어미는 땅덩이가 꺼져 내려앉는 듯한 길고도 무서운 복통 끝에 흡사 핏속에서 쏟아내듯 작은 계집아이 형상을 하나 낳아 놓고는 그 날 새벽으로 영영 그만 눈을 감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아침에야 비로소 소리의 사내가 그 후줄근한 모습을 드러내며 소년의 집 사립문을 들어서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도 그때의 그 사내의 얼굴이 소리의 진짜 얼굴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년에게 여전히 그 뜨거운 햇덩이가 소리의 진짜 얼굴로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달라져버린 소리의 사내가 핏덩이 같은 갓난애와 소년을 데리고 이 고을 저 고을로 소리를 하며 밥 구걸을 다니고 있었을 때도, 소리의 진짜 얼굴은 언제나 그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 쪽이었다.

괴롭고 고통스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심판인지 사내는 그 고통스런 소리의 얼굴을 버리고는 살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햇덩이가 뜨겁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속절없이 맥을 놓고 늘어졌다. 그는 그의 햇덩이를 만나기 위해 소리를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식으로 이날 이때까지 반생을 지녀온 숙명의 태양이요 소리의 얼굴이었다.
 

▲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제법 긴 문장을 고스란히 인용한 까닭은 이 문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편제> 3부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서편제>는 물론이거니와 <소리의 빛>에서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인용돼 있다. <서편제>에서 이 문장 이후의 서사는 소릿재 주막의 여자가 소리꾼의 딸이 눈이 멀게 된 내막, 여자의 아비가 잠든 계집 자 눈 속에다 청강수를 몰래 찍어 넣었다는 것과 눈 먼 딸이 어렸을 적에 소리 장단을 부축해 준 북채잡이 어린 오라비가 있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소릿재 주막을 찾은 사내는 다름 아닌 이야기 속의 눈 먼 여자의 씨 다른 오라비임을 짐작하게 된다.

사내는 왜 누이를 찾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쯤 <서편제>는 끝이 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서편제>의 속편인 <소리의 빛>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작에서는 분리된 채 등장한 두 주인공인 의붓남매가 전라도 장흥의 한 살골 주막에서 만난다. 그 과정에서 살의(殺意)가 곧 생의 의지였던 오라비의 삶과 원한이 곧 그리움이었던 누이의 삶이 교차한다. 그러니까 ‘소리의 빛’은 두 사람이 살아온 ‘생의 그림자’인 것이고,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사라지는 빛처럼 판소리와 북 장단으로 만난 남매의 해후도 소리의 여운만 남긴 채 헤어진다.

남매는 왜 헤어졌으며, 무엇 때문에 다시 만나는가, 그리고, 어렵게 만났음에도 왜 헤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도 앞서 인용한 문장 속에 있다.

오라비에게 의붓아비는 ‘소리’인 동시에 이글거리는 ‘햇덩이’이다. 나무에 묶여서 어미의 노랫가락인지 울음인지 모르겠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어린 그의 머리 위에는 태양은 타올랐고, 소리의 사내가 마을에 들어올 때에도 태양은 타올랐으며, 사내의 아이를 낳은 뒤 어미가 죽은 뒤에도 태양은 타올랐다. 그렇게 보면 그 태양은 인디언 설화에 등장하는 부성부재(父性不在)의 상징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오라비에게 태양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외려 증오의 대상이다. 오라비에게 태양이 살의였음을 알려주는 것은 누이이다. 눈 먼 누이에게 소리가 원한에서 한으로 다시 아득한 그리움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오라비에게 태양이 생의 억압 혹은 부재에서 생의 의지로 다시 까마득한 그리움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눈 먼 여자와 함께 사는 주변머리 없는 사내가 남매의 만남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인상 깊다.

“사람들 중에는 때로 자기 한 덩어리를 지니고 그것을 소중스럽게 아끼면서 그 한 덩어리를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위인들이 있는 듯 싶데그랴. 자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알고 보면 자네 오라비라는 사람도 아마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레 한 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 아니겄는가. 그 한덩어리를 원망할 것 없을 것 같네. 더더구나 자네같이 한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일세.”

사내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남매는 그리움을 가슴에 묻어둠으로써 그리움이 깊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라비에게는 그 그리움이 햇덩이로, 누이에게는 한덩어리로 표현될 뿐.

<소리의 빛>의 후속작인 <선학동 나그네>에서는 두 주인공은 만나지 못한다. <서편제>와 마찬가지로 오라비는 누이를 찾아가지만, 누이를 대신해 누이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라비는 누이를 만난 것은 물론이고 누이가 부르는 노래에 사라진 학이 돌아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오라비의 발길이 닿은 곳은 선학동. 그곳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포구 안쪽에 자리 잡은 선학동의 뒷산 모습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그 산세가 영락없는 법승의 자태를 닮았다. 관음봉은 법승의 머리를, 그리고 좌우로 길게 펼쳐 내려간 양쪽 산줄기는 법승의 장삼자락을 닮았다. 마을 앞 포구에 밀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이 문득 한 마리 학으로 그 물 위를 날아오른다. 물 위로 떠오르는 관음봉의 그림자가 영락없는 비상학의 형국을 자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포국에 물길이 막힌 뒤부터 관음봉이 한 마리 선학으로 물 위를 날아오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막집 사내는 오라비에게 “포구물이 말랐다고 학이 아주 못 나는 것은 아니지요.”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리고 주막집 사내는 예전에 의붓아비와 누이가 이 마을을 찾아왔을 때의 일을 회고한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선학동 뒷산 관음봉이 물을 타고 한 마리 비상학으로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면, 노인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그 비상학을 벗 삼아 혼자 소리를 시작하곤 했어요. 해질녘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부녀가 그 비상학과 더불어 소리를 시작하면 선학이 소리를 불러낸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한 것인지 분간을 짓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지요.”

이어서 주막집 사내는 아비의 유골을 들고 찾아온 눈 먼 딸을 기억하는 데 이른다. 포구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소리는 언제나 포구 밖 바다에 밀물에 들어오는 때에 맞추고 있었고, 그것도 마치 성한 눈을 지닌 사람이 바닷물이 차오르는 포구를 내려다보듯 한 눈길로 반드시 마루께로 자리를 나앉아 잡고서였다.

물 위를 날아오른 학과 함께 노닐던 아비의 소리와 그 소리를 기억하는 눈 먼 딸의 소리. 여자는 날마다 밀물 때를 잡아서 소리를 하였고, 소리는 언제나 선학동을 옛날의 포구로 변하게 하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남매의 이야기는 ‘질곡의 정한(情恨)’에서 ‘도저(到底)한 깨달음’으로 승화된다. 눈이 멀었기에 오히려 성한 사람보다 더 밀물 때를 알았던 누이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두 눈을 잃고서야 천안을 얻은 아나율 존자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오라비가 고갯마루를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자 그 위로 백학 한 마리가 비상하는 마지막 장면의 묘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미욱한 중생에게 보여주는 비상학의 선경인 동시에 득음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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