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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아라한, 초기불교의 최고 성인 ②
아라한은 최고의 덕 갖춘 완전한 존재
2017년 09월 27일 (수) 13:24:06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은 최고의 성인이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 아라한의 경지에 대한 논란이 생긴다. 대표적인 예는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나타난 ‘대천(大天 : Mahādeva)의 오사(五事)’일 것이다. 어떤 이는 아라한 개념 논란으로 불교 교단이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근본분열(根本分裂)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대천의 오사’와 관련한 교단분열 전설을 근본분열로 보기보다는 근본분열 이후 대중부 내 지말분열(支末分裂)로 보려는 경향이 우세하다. 즉 근본분열은 계율상의 10가지 문제로 상좌부와 대중부가 분파된, 제2결집에 따른 분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천의 오사’란 대천이라는 고승이 제창한 아라한의 경지에 관한 다섯 가지 주장이다.첫째, 아라한이라도 천마(天魔) 등의 유혹에 빠지면 부정(不淨)이 흘러나옴을 면치 못함〔餘所誘〕, 둘째, 아라한이라도 무지, 즉 염오무지(染汚無知)는 없으나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는 아직 존재함〔無知〕, 셋째,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 있음〔猶豫〕, 넷째, 남으로 하여금 오입(悟入)하게 함〔他令入〕, 다섯째, 도는 소리에 의해 생겨남〔道因聲故起〕을 말한다. 이는 아라한의 경지를 낮게 보려는 후대의 해이해진 아라한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아라한이라도 천마(天魔) 등의 유혹에 빠지면 부정(不淨)이 흘러나옴을 면치 못한다는 주장은 일체번뇌를 다한 아라한이 억압된 성적 욕구가 남아 있어 몽정(夢精)도 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 이미 아라한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 근본적인 의미의 아라한은 일체 번뇌를 다해 무의식적인 욕구충족이나 욕구표현인 꿈과 그리고 이를 통한 몽정이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설명된다.

아라한은 멸진정(滅盡定)의 성취자이다. 초기경전에 멸진정은 적어도 불환과(不還果) 이후부터 가능하다는 것과 부합된다. 아라한은 항상 선정을 닦는 수행자이다. 그리고 범부와 달리 더 이상 악업(惡業)을 지을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속박이 되는 선과 악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라한은 붓다와 마찬가지로 항상 ‘염처(念處 : satipaṭṭhāna)’의 상태에 있다. 즉 여실지견(如實知見 : yathābhūtañāṇadassana)의 상태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를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 하며, 이를 다시 성문사과(聲聞四果)나 사문사과(沙門四果)라 이름 하기도 한다. 성스러운 삶의 길에 들어서 일체번뇌를 단절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마지막 완성의 단계까지 보여주는 데 다음과 같다.

① 예류향(豫流向) ⑤ 불환향(不還向)
② 예류과(豫流果) ⑥ 불환과(不還果)
③ 일래향(一來向) ⑦ 아라한향(阿羅漢向)
④ 일래과(一來果) ⑧ 아라한과(阿羅漢果)

첫째, 예류향과 예류과는 수다원(須陀洹)이라 음역되기도 한다. 최종적인 목표인 아라한에 이르는 길에 있어 그 시작으로 ‘성인의 흐름’ 또는 ‘도의 흐름에 들어갔거나 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거룩하고 성스러운 길 또는 흐름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입생 성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리적인 설명으로는 욕계(欲界)의 오하분결(五下分結) 가운데 삼결(三結 : 有身見. 戒禁取見․疑)이 끊어진 경지다. 여기에 달한 자는 많으면 일곱 번까지 인간과 천상(天上)에 윤회하고 마침내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 하지만 수행의 정도에 따라 7번을 2번 또는 3번, 또는 1번으로 줄일 수도 있다 한다.

둘째, 일래향과 일래과는 사다함(斯陀含)이라 음역되었는데 신라 화랑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시 한 번만 이 세계에 돌아온다’는 뜻으로 여기에 도달하는 자는 한 번만 더 태어나면 그 다음에는 해탈하기 때문에 일래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오하분결 가운데 삼결과 삼독(三毒)이 엷어진 자를 말한다.

셋째, 불환향과 불환과은 아나함(阿那含)이라 음역되었는데 말 그대로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죽으면 다시 돌아오는 일없이 천상세계에서 열반을 얻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이름한다. 욕계의 오하분결을 모두 끊은 경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아라한향과 아라한과는 불교의 최고 목표인 일체 번뇌를 끊어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최고의 지위를 이룬 자이다. 따라서 ‘최고의 덕을 갖춘 완전해진 존재’라 칭할 수 있고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경지를 가정하지 않았던 것이 불교 본래의 입장이었다. 교리적으로는 오하분결을 포함한 삼독과 일체번뇌를 다한 자를 말한다. 그래서 또한 인간․천상세계의 공양에 마땅히 응할 자격이 있는 적격자라는 의미에서 ‘적자(適者)’ 또는 ‘응자(應者)’라는 이름을 얻기도 한다.

초기경전에 공통적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계기를 표현하는 정형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깨끗한 믿음의 마음으로써 위없는 청정행을 닦고 현재에 있어서 스스로의 몸으로 증명하여 생사는 이미 다하고 청정행은 이미 세워졌으며 할 일은 다해 마쳐 다시 목숨을 받지 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렇게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네 위(位)로 나누고 각 위를 다시 향(向 : 향해 가는 과정)과 과(果 : 결과로서 도달점)로 나누는 것을 사향사과(四向四果)라 한다. 여기서 다시 아라한향까지를 유학(有學)이라 하여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만을 무학(無學)이라 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아라한이라는 말이 사용된 경명이나 품(vagga)이 많이 있다. 그 중 《Arahanta Sutta》이라는 경전에서 붓다는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자가 ‘나’나 ‘나의 것’이라는 언사를 쓰는 것이 유아론(有我論)적 견해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세상의 관용적 표현의 아(我)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또 다른 경에서는 아라한을 오취온(五取蘊)의 생멸(生滅)을 여실지견한 존재로 아라한을 설명한다. 아라한은 여실지(如實知)의 구족이라는 정지(正智)에 의해 해탈한 존재이고 사신족(四神足)의 수행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를 말한다. 이는 붓다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경에서 아라한과 정등각자(正等覺者)는 사성제를 모두 원만하게 여실지한 것으로 설명된다.

아라한의 경지에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가 제거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한다. 아만(Māna), 비난(omāna), 거만(atimāna), 증상만(增上慢 : adhimāna), 옹고집과 같은 완고함(thamha) 그리고 비천한 오만〔卑卑慢 : atinipāta〕이 그것이다. 여기서 후대 불교에서 아라한을 증상만의 존재로 비판하게 되는데 사실 초기 경전에서 아라한 개념이 증상만을 제거한 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라한 이전의 불환과(不還果)에서는 불신(不信:Assaddhiya), 무참(無慚 : ahirika), 경솔함(anottappa), 나태(懶怠 : kosajja), 무념(無念 : muṭṭhasacca), 악혜(惡慧 : duppaññata) 등의 번뇌가 제거된다. 다음의 아라한과는 해태(懈怠 : thina), 혼침(昏沈 : middha), 도거(掉擧 : uddhacca), 도회(掉悔 : kukkucca), 불신(不信: assaddhiya), 부주의(不注意 : pamāda)까지도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한다. 이러한 덕목은 아라한과에 수반되는 것으로 탐욕개(貪欲蓋 : abhijjha / kāmacchanda)와 진에개(瞋恚蓋 : byāpāda), 그리고 의개(疑蓋 : vicikiccha)가 이미 제거된 이후 또 다른 번뇌들이 모두 소멸되었음을 보여준다.

탐욕개, 진에게, 혼침개, 도회개, 의개의 오개(五蓋)는 정형적으로 사선(四禪) 중 초선의 성취와 함께 제거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다시 아라한과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오개가 아라한과 이전에 있어서는 쉬고 그치는 것인데 반해 아라한과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지멸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초기불교는 수행에 따라 점진적으로 번뇌가 소멸되어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함을 자상하게 설명한다. 이는 후대 동아시아 불교의 선종과 비교되는 점이다. 이처럼 아라한은 이 세상에서 최고 완전한 존재로 설명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여래 10호에 나타나나듯 아라한의 한 분이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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