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구해왕과 신라 지증왕의 증손자
가야왕족 신라 편입 초기 따돌림 당한 듯

꼬마 호랑이를 들어 메친 알천공을 유신공은 어떻게 다뤘을까? 유신공의 위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슨 일을 하면 그런 위엄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김유신은 595년(진평왕 17)에 태어나서 673년(문무왕 13)에 죽을 때까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이다.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박힌 돌인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굴러온 돌의 뜻으로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무력이나 서현은 참으로 세상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망한 나라의 왕이었으니 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532년(법흥왕 19)에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는 나라를 신라에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아들 무력(武力)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行軍摠官)이 되었다. 무력은 이러한 공로로 각간의 자리까지 올랐다. 가야연맹에서 볼 때 금관가야는 백성과 나라를 신라에게 판 인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에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돼 있다. 들어서 합궁을 했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연애’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에서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에피소드는 존재하나 보다.

김유신이 어릴 때 그 모친이 엄하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야합을 해서 낳은 자식이니 얼마나 창피했을까?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덮고자 아이는 엄하게 가르쳤나 보다. 여하튼 그렇다고 창피함이 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그런 교육이 성공할리도 없다. 그래서인지 김유신은 그 아버지 아니,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인지 방탕하게 살았다. 천관녀라는 기생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온 유신을 모친이 꾸짖었다. 다신 안가겠다고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해 말이 잘못 길을 들어 기생집으로 갔다. 김유신이 술에서 깨어 살펴보니 기생집인지라, 곧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단호함을 보였다고 하나 다 뻥이다. 실컷 잘 가서 놀고 나서는 어머니가 무서운 마마보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자기 살자고 애마를 죽인 김유신은 이미 떡잎부터 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김유신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도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다. 김춘추와 사통시키고는 일부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는 지경까지 만들게 한 것도 김유신의 머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대단한 담력의 소유자였고, 이런 상황극을 리얼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마도 누이와 사전에 상의도 안했을 것이다. 그러니 장작더미 위에 영문도 모르고 두 손을 묶인 누이는 장난인 줄 알았을 것이다. 부모 남매 모두 나서서 만들지만 이 고집불통 김유신은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게 ‘위엄’이면 위엄이었을까? 불이 타들어가자 이게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오빠 김유신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누이는 정말 혼절 직전까지 갔을 것이다. 아니 실신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반대하던 선덕여왕이 굳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내시나 그와 비슷한 근시직(왕의 지근에서 보필하는 신하)를 시켜 선덕여왕을 전각 밖으로 안내하게 한 것도 분명 작전이었다. 딴 데를 봐도 될 것을 굳이 김유신 집 쪽을 가리켜 연기를 보게 한 것도 마찬가지다.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짠 김유신은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뇌물을 잘 뿌렸는지 계획을 성공시킨다. 여하튼 사람들은 김유신의 그 ‘위엄’에 감복했나보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그 후 장군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유신은 실전과 모략의 명수였다. 까닭에 항우와 유방의 고사에서 볼 수 있듯이, 알천은 항우였고, 김유신은 유방이었나 보다. 오지암회의의 공식적인 장은 상대등인 알천이었으나, 비공식적인 실세는 역시 김유신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듯싶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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