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가 ‘설정 스님 서울대 허위학력 사실 인정’이란 본지 기사를 보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8일 글을 올렸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한 홍 교수는 “학력 허위 기재는 표절보다 더 나쁘다”고 강조했다.  홍창성 교수의 글을 전재한다.<편집자주>

▲ 홍창성 교수<사진-페이스북에서>

부끄럽게도 법명조차 없는 나는 결국 어느 종단에도 제대로 귀의할 수 없을 듯하다. 지난 5년 동안 현응스님께 법명을 지어달라고 세 번이나 부탁드렸다가 세 번 모두 퇴짜 맞았다. 50대 중반에 있는 나는 아직까지 세상 어디에서도 이토록 참혹하게 차여 본 적이 없다. 작년에는 수개월의 시간을 투자해 스님의 책을 영어로 번역까지 했는데도, 나는 아직도 법명이 없다. 그런데 지금 뒤돌아보니, 스님께서는 내가 어느 종단에도 제대로 귀의할 위인이 못된다고 이미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역시 참으로 밝은 눈을 가진 스님이시다. 그래서 법명도 없는 엉터리 불자인 나는 마음의 큰 부담 없이 한번 자유롭게 조계종단 흉을 보기 시작하겠다. 불행 중 다행이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미국대학에는 논문표절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다. "다른 이의 글을 연이어 다섯 단어를 초과해 옮겨 적으면서도 주석 등으로 출처를 표기하지 않으면 표절"이다. 이 엄정한 규칙을 어기는 학생은, 교수의 재량이 다소 작용하지만, 원칙적으로 그 과목은 F를 받고 징계위원회로 회부되어 정학 등의 처분을 받는다. 나도 학생들을 이렇게 계도한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미국학생들 가운데 이 규칙을 어기는 경우는 정말 거의 없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북유럽 출신의 이민자 후손들이 살고 있는 미네소타의 학생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하게 정직하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어떤 저의를 품고 나를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을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어쩌다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제도와 법규를 이용해서 강력하게 처벌을 받게 만들면 되기도 하니까 별로 문제는 없다 (이건 좀 너무 비불교도적 태도인가?). 어쨌든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다보니 이곳 사람들이 살이 더 잘 찌는지도 모르겠다.

“명망 높다는 선승의 모습 이해하기 어려워”

조계종 현 총무원장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는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의 서울대 학력 허위 기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참 적당한 말이 없을 정도로 황당하다. 복이 많아 일찍 출가하신 수행자께서 무엇이 모자라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그런데 이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총무원장에 출마하겠다는 75세 노스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세속적 욕구이다. 아마도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해타산이 맞아 떠받쳐 주는 세력의 맹목적 지지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 때문에 나온 입장일 것이다. 명망 높다고 들은 선승께서 보이시는 이런 모습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에 살지 못해 직접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 사회 문제나 조계종단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언급을 자제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토록 분명하게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다.

심각한 이야기를 좀 덜 심각하게 인상 펴고 늘어놓기 위해 좀 여담을 해야겠다. 내 강의들에서 표절로 쫓겨나 정학 등을 맞는 학생들은 거의 모두 외국인 학생들 특히 내 불교철학 강의를 듣는 네팔 출신 학생들이다. 자신들이 석가모니가 탄생한 나라에서 왔다며 대단한 자부심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계속 표절된 논문들을 제출해 속을 썩인다. 이들 가운데는 성씨가 석가족의 Shakya인 경우도 있는데, 물어 보니 정말 그 옛날부터 있어 온 석가족의 석가씨라고 했다. 스스로들 석가모니부처 부족의 후예들이라고들 믿고 있었다. 또 고타마 싯타르타가 6년 고행 끝에 기력이 쇠해 실신했을 때 특별한 우유죽으로 기운을 차리게 도와 준 여자 분의 이름이 수자타였는데, 똑같은 이름을 가진 네팔 출신 여학생이 논문을 표절해 내게 F를 맞고 정학 당했다. 솔직히 말해, 고타마 싯타르타가 환생해 내 강의를 들을 경우라도 만약 "다른 이의 글을 연이어서 다섯 단어를 초과해 옮겨 적으면서도 주석 등으로 출처를 표기하지 않으면" 나는 그 논문을 표절 논문으로 간주하고 고타마에게 F를 주고 정학을 때리게 하겠다. 표절은 도둑질이나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남의 글을 도둑질해 자기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하기 때문이다.

“학력 허위 기재로 선출돼 피해 입히면 민형사상 책임져야”

학력 허위 기재는 이런 표절보다도 더 나쁘다. 이것은 없는 학위를 허위로 도둑질해 자기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이고 또 이로 인해 얻는 이득은 논문 하나 표절해 얻는 이득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력 허위 기재로 사람들을 오도해 높은 자리에 선출됨으로써 그 조직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며 분명 형사상 민사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조계종단에서는 이런 문제가 있는 설정스님이 차기 총무원장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아무래도 큰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상황에서조차 설정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나서겠다고 하시지는 않을 테니까, 논리적으로 이치가 그렇다. 뭐 적당한 말이 없다. 그토록 많은 분들이 왜 조계종단의 행태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또 분노하는지 이제 나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는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고 싶지 않게 될 것 같다. 물론 나같이 엉터리 불자인 주제에, 그것도 미국에 26년이나 살면서 한국에 있는 종단에 날을 세우기 시작한 나를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겠지만.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1980년대에 비판불교가 태동하게 된 계기가 이 대학이 소속된 종단의 최고위 스님이 공식석상에서 뻔한 거짓말을 한 사건이었다고 듣고 또 읽었다. 이 대학 비판불교론자들의 진단으로는, 이런 황당한 문제가 생긴 원인은 근본적으로 일본 불교가 (대단히 비불교적이고 힌두교적인) 불성/여래장/본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성 여래장 사상은 우리 모두가 원래부터 이미 깨달은 부처라고 하는, 듣기에 대단히 흐뭇하고 근사한 주장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 아득한 오랜 옛날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경로로 성립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어쩌다가 경전이라고 칭해지는 곳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가 못된다. 연기(와 공)의 이치에 맞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지금까지의 불성 여래장 본각 사상은 이에 어긋난다. 어쨌거나, 이 사상에 의하면 모두가 본래부처라는 사실(?)을 참선 등을 통해 깨치기만 하면 명실상부한 (a full-fledged) 부처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비판불교론자들에 의하면, 이렇게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굉장한 헛소리(?)가 자기네 종단의 최고위 스님이 공식석상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게 만든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판불교론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나는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라고 해서 이들의 비판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있을까? 혹시 수행 중에 호흡 조절하다가 어쩌다 자못 묘한 기분이 들면 그것이 숨어있는 불성을 깨쳤기 때문이라고 잘못 여기고는 깨달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이제 깨달아 부처가 되었으니 대자유인이 되었다며 무슨 일 무슨 말을 해도 깨달은 사람들의 경지에서나 이해되는 것들이라며 어리석은 대중은 그들의 행태를 무조건 경외하며 받들어 주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일들이 벌어져 오고 있지는 않았던가? 내게는 아무래도 학력을 허위로 기재하고는 그 오랜 세월 동안 큰 자리 여럿 한 설정스님과 또 선거법을 뻔히 위반하고도 총무원장 하겠다고 뛰어다니고 있는 수불스님이나 모두 호흡 조절하다가 또는 염불하다가 '불성을 깨쳐서' 부처님이 되셨으니 무슨 염치없는 일을 해도 총무원장 자격이 넘쳐흐른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마음' 타령, 학문적으로 크게 깨우쳐 주어야”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 이런 문제를 학문적으로 타개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비판불교가 태동했다. 멋진 일이었다. 학자들의 현실문제 참여는 원래 이렇게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가끔 직접적인 참여가 불가피하기는 하겠지만. 학자적 소양은 밑바닥인 주제에 맨날 괜히 나서서 얼굴이나 팔기 원하는 일부 관심병 걸린 자들은 학자가 아니라 교수라는 직함을 광내기 위한 명함 정도로밖에 가치를 두지 않는 협잡꾼들이다. 그래서 이제 한국의 학자들도 분노만 표출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앉아서 학문적으로 이 문제를 다룰 계획도 세워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매일같이 비분강개하며 세월만 축낼 것이 아니라, 심호흡 크게 하면서 큰 결심으로 연구에 매진해서 학문적으로 종단의 문제를 조명하고 해결하려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길이 훨씬 오랫동안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라는 점이다. 공부 안하는 게으른 학자들이 엄두를 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학자들은 먼저 비불교적이고 힌두교적인 불성 여래장 사상부터 이론적으로 과감히 그리고 철저히 비판해서 건질 것은 건지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수행한다며 호흡 조절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실체(實體)로서의 불성을 깨쳐 깨달으려는 모든 분들을 헛된 수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무슨 이야기 하는 줄도 모른 채 매일 같이 연기법에 어긋난, 비불교적인 실체(實體)로서의 '마음' 타령이나 하면서 장사하는 분들도 학문적으로 크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제대로 된 학문 연구를 통해 비판적 사고력 훈련을 철저히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동아시아 불교를 가르치는 엉터리 소리가 이제는 정말로 피곤하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만난 세계 최고 권위의 불교철학자 몇몇이 나보고 동아시아 불교철학은 엉터리니까 연구주제로 택하지 말라고 정색을 하면서까지 말했을까. 정말 얼굴이 뜨거워 쥐구멍이라고 찾고 싶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모든 스님들과 불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부둥켜안고 같이 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러다가 이런 글까지 발표하고 있으니, 한국에 들러 어느 절에 찾아가도 아무도 반기지 않게 생겼다. 뭐, 옳다고 생각하는 말 하다가 얻어맞는 것이 철학자가 타고난 업인데, 어쩌겠는가.

-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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