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방 윗목에 콩나물시루를 들여놓고 키웠다. 콩을 시루에 넣고 빛을 차단한 채 물만 줘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랐다. 일종의 수경재배인데, 어린 눈에 노란 새싹이 돋아 시루가 터져라 빼곡히
자라는 게 신기했다.

지금도 그런 버스•지하철 노선이 있겠지만, 1970년대 버스는 ‘콩나물시루’였다. 출근과 등교 시간이 겹치는 아침 시간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사력(死力)을 다해 차에 올라야했고, 올라탄 순간부터 숨을 쉬기 위해 온몸으로 버텨야했다. 나같이 키 작은 아이에게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를 넘어 거의 지옥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콩나물시루’란 말의 비유적 의미를 모른다. 아직도 특정 구간의 버스•지하철은 승객이 지나치게 많다는 기사를 접하지만, 예전보다는 덜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송곳 하나 꽂을 틈이 없는(‘立錐의 餘地가 없는’) 그런 공간을 참고 견뎌내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도 에어컨이 있어 견딜 만하지만, 예전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고, 버스 창문을 열어도 시원한 바람은 내게 닿지 않았다. 당시 언론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콩나물시루’나 ‘지옥철’로 비유한 건 전혀 과장된 수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동인의 단편 <태형(笞刑)>은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1919년 여름의 감옥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에서 좁은 방에 갇혀있는 수인(囚人)들은 옆사람에게 거의 살인적인 적의를 느끼고 증오한다. 그것은 서로가 내뿜는 체온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좁은 감방에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는 겨울에는 서로 껴안고 지내다가 여름에는 몸이 살짝 닿기만 해도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1990년대 지하철 1호선의 ‘푸시맨’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푸시맨’이란, 지하철을 타려는 승객을 밀어서 억지로 태우기 위해 고용된 아르바이트생을 지칭하는 말로, 당시 지하철이 왜 ‘지옥철’로 불렸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 소설 화자의 아버지는 선량하고 고지식한 직장인으로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지하철로 출근한다. ‘푸시맨’ 아르바이트생으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본 화자는 키 크고 건장한 사람들 틈에 끼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버지가 ‘기린’처럼 목이 길어져 숨이라도 제대로 쉬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사람은 콩나물이 아니어서, 몸을 가누기는커녕 숨도 쉬기 어려운 버스나 지하철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한편 사람들은 시루에 콩나물을 기르고, 아직도 어느 지역에서는 ‘콩나물시루’같은 버스나 ‘지옥같은’ 지하철로 출퇴근, 등하교를 한다. 내가 직접 듣거나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의 불만이나 저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좁은 울타리에 갇힌 채 물과 사료만 공급받으며 잠도 자지 못하고 알을 낳거나 살만 찌우도록 사육당하는 닭과 돼지의 처절한 비명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에 치명적인 상처와 흔적을 남길 것이다. 최근에 불거진 살충제 달걀 파동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의 한 극한을 보여준 사건이다. 우리는 고기와 알을 더 싸게 많이 먹기 위해 가축을 학대한다. 예전에는 가축을 직접 길러 잡아먹었기에 약간의 죄책감과 동정심을 느꼈지만, 지금은 모든 게 공장화되어 있어 사람들은 고기를 하나의 상품으로 여길 뿐이다.

콩나물시루같은 버스나 지옥철에서 견디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십 분이다. 인간은 그 짧은 시간을 못견뎌하지만, 닭•돼지 등은 평생 좁디좁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다 죽임을 당한다. 동물만 그런 게 아니라, 논밭에서 밀집 재배되는 벼•보리•옥수수 등 식물도 그런 고통에 아우성칠지 모른다. 식물과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 잘 먹기 위해서다.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동식물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기필코 보복을 할 것이다. 사람이 양고기를 먹으면 그 양이 후세에 사람이 되어 양으로 변한 사람을 잡아먹을 거라고 《능엄경》이 일찍이 경고한 바 있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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