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계승 결정…선덕·진덕왕 즉위 문제와 연관 깊어
중고기 화백회의와 연관…알천 왕 추대회의로 보기도
 

탐사역사학의 방법론을 들이대보면,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유신공이 모인 남산의 오지암 또는 우지암이 어느 곳인지 궁금해진다.

우지암은 신라에서 신성시하였던 경주 남산에 있는 바위이다. 도당산(都堂山)은 남산 정상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마지막 끝에 솟아 있는 세 봉우리의 작은 산으로서 반월성에서 가장 가까운 남산의 일부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 우지암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경주 남산 삼릉계(三陵溪)의 속칭 기암(碁岩)으로 추정하거나, 남산에서 서라벌 전체를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상선암(上仙巖) 마애불의 북봉에 해당된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다들 이런 저런 논리로 이야기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근거도 부족하니 그냥 남산에 있는, 최소 10여 명이 넉넉히 앉아도 될 반석 같은 큰 바위라고 보면 될 듯싶다. 요즘 인공위성이 좋으니 찾아보면 될 듯한데, 너무 많아 비정하기 어렵다.

이곳에서 신라의 대신(大臣)들이 모여 귀족회의를 한 것이라고 본다. 근데 왜 굳이 여기 와서 회의를 한 것일까? 《삼국유사》 권1 <기이> 1 ‘진덕왕’ 조에 등장하는 우지암 회의는 선덕․진덕 두 여왕의 즉위 문제와 결부된다. 전근대사에서 왕권의 쟁탈이야말로 최고의 정치사이다. 그 어떤 막장드라마보다도 재미있는 정치사의 한 장면이 바로 다음 왕위를 계승할 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과 ‘상대등 비담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는 우지암 회의는 신라 중고기 화백회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왔다. 진덕왕 1년에 상대등이 된 알천공을 중심으로 대등(大等)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대신(大臣)들이 참석한 것으로 봐 온 것이다. 어떤 이는 여러 관부의 장관이 주로 참석하는 군신회의(群臣會議)로서 장관들이 주도하는 국무회의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 <신라전>에서는 “국가에 큰 일이 생기면, 여러 관리들이 모여 자세히 논의한 다음에 결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굳이 사료들을 찾아보지 않아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화백이든 귀족이든 관료든 장관이든 누구든 모이지 않았을까? 광범위한 겸직이 행해졌을 테니, 결국 당시 힘 좀 쓰는 최고 권력자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이들이 왕위 계승과 관련된 시기에 모였으니, 거의 칼만 안 들었지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영웅들이 굳이 남산으로 모인 것은 사실 ‘전투’의 후유증이었을 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뒤 수습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투’를 잠시 쉬고 오지암에 참석한 이유는 모두 무장하고 도성 안에서 싸울 수 없었거나, 싸우는 게 어려웠기에 불가피하게 남산으로 모인 것으로 보면 될 듯싶다. 아마도 남산 주변의 신관들과 법사들의 중재하기 위해 다 모였을 것이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종교계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나 보다. 천신이나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서 말이다.

여하튼 담판을 위해서 모여든 이들은 선덕왕이나 진덕왕 사후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 다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진덕왕이 죽은 뒤에 알천을 추대하기 위한 회의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장이 출가하기 전인 선덕여왕 초년의 기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봐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진덕왕대로 보는 것이 크게 틀림은 없을 듯하다.

여하튼 이런 우지암 회의에 난데없이 호랑이가 뛰어든다. 모두들 다 도망쳤는데 알천공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랑이 꼬리를 잡고 빙빙 돌렸는데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땅에 메다꽂아서 죽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어린 호랑이라고 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모두 기가 차서 알천공을 돌아봤을 것이다. 그때서야 겸연쩍게 자리로 다시 돌아온 대신들은 아마도 엄청 창피했을 듯싶다.

선종랑 즉, 자장 율사의 아버지인 무림공(호림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염장을 잘 질렀는데 염장공 역시 정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창피를 당했으니, 입으로는 알천공의 담력과 완력은 역시 대단하다고 칭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천공이 없었다면 사실 그리 창피할 일도 아니었다. 그 역시 놀라서 도망쳤다면 모두들 한바탕 웃을 것인데, 알천공 덕택에 창피를 당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꾀돌이 유신공이 놓칠 리가 없다. 완력이나 담력도 그에 못지않은 유신공의 활약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김유신이 장난을 친 것 같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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