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연기법과 청정 자정을 강조
"세상 무엇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정 못하면 조정되는게 연기법칙
치부 전횡 감추려 해종 외부 운운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전법 그리고 포교는 외부와의 연결이자 소통입니다. 특히 불교는 연기법(緣起法)을 강조합니다. ‘홀로 존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연기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청정과 자정을 강조합니다. 만약 내부의 청정과 자율이 없다면 당연히 외부에 의해 청정과 자율을 강요받고 조정되는 것이 연기이도 합니다. 그것은 종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불교와 종단은 사회 안에 속해 있으며 많은 국민들, 비불교인과도 연결되어 있고 최소 사회법에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문제에 눈감고 숨기고 자정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 당연히 외부에 의해 혹은 사회법에 의해 조정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치부와 전횡을 숨기고자 바른 소리하는 신도들과 언론 그리고 재가, 사회단체에게 해종세력 심지어 이교도, 외부세력 운운하는 것 이제 지겹습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조계종에서도 노동위원회등 여러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對) 사회 활동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외부세력이 됩니다.

1901년 제주서 일어난 '신축교난'
관 아닌 민중과 천주교인의 혼란
급속히 부패한 천주교의 주류부상
세력 업고 백성 핍박함이 그 원인

한국 천주교 수난사 중에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신축교난(辛丑敎亂)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존의 천주교 박해와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천주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1700년대 후반부터 전래되어 1백여 년 동안 박해를 받습니다.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이후 우리 정부에 의해 천주교 선교와 종교의 자유가 허가되고 불과 16년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흔히 ‘이재수의 난이라고 더 알려진 사건입니다. 관(官)에 의한 천주교인의 박해가 아닌 일반 민중과 천주교인 사이에 일어난 혼란으로 수백여 명의 많은 천주교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서양 천주교 신부와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전횡과 사법적인 힘을 능가하는 권력으로 무고한 백성들을 핍박함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불과 10여 년 만에 핍박받던 천주교인이 제주도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주류로 부상하면서 건강성과 청정성을 잃고 급속히 부패하였고 이른바 외부세력(조계종단의 시각으로 보면 외부세력이나 이교도)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려 말 불교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습니다. 부패에 자정작용이나 개혁이 없었던 불교는 결국 신진사대부(조계종의 시각으로 외부세력 혹 이교도라고 한다)에게 공격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지고 조선 500여년 동안 암흑의 시기를 보냅니다.

만약 불교가 그 당시 조금의 자정능력이나 시대를 주도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었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양심 없으면 허무하게 무너져
조계종서 하는 일들 정말 불교가 맞나
깨달았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
자비심 없는 돌부처들 양산해서 되겠나


결국 건강성이나 청정성 그리고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지 않은 집단은 외부의 충격과 도전에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이 연기법이고 진리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면 외부의 충격이나 혹 진짜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 할지라도 어떤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간화선을 종지로 하고 1600여년 통불교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이라는 조계종을 보면 이 속담이 떠오릅니다.

도대체 종단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불교가 맞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최근 나름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스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그분에게 하화중생(下化衆生)은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정토로 혹은 화장장엄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으로 회향해야 하지 않겠느냐”의 말에 “화장세계도 상(相)이며 지금 화장세계인데 무엇을 또 찾느냐”는 말을 할 때 저는 더 이상 논쟁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왜 꼭 행동으로 나와야 하느냐”고 하더군요. 깨달았다는 이 분 "숨은 왜 쉬고 밥은 왜 먹느냐 아니 왜 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이처럼 이른바 ‘착각도사’가 많습니다.

조주 스님이 이르길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을 왜 이렇게 곡해하는 것일까요. 수행이 그냥 돌부처가 되는 과정인가요. 감정도 이성도 그리고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드는 과정일까요. 과연 그분의 깨달음은 산송장과 무엇이 다른가요?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이들이 언어의 굴레에 갇혀 스스로 그 의미를 곡해하고 아무런 감정도 자비심도 없는 자기만 아는 돌부처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수행입니다.

사회와 그리고 사람들 즉 외부와 동화되지 못하고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쪽 깨달음. 심즉시불(心卽是佛)만 알지 심작시불(心作是佛)은 알지 못하고 색즉시공(色卽是空)만 알지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알지 못하는 깨달음, 이것이 한국불교 주류의 수행법인가요?

제가 어리석고 수행이 덜되어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수준이라서 그런가요. 저는 어리석고 아둔합니다. 그러니 제가 어리석어 이런 말을 한다면 대덕이시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비굴을 인욕이라 사는 이들이여
한국불교 이 지경은 그대들의 탓
일말의 양심 갖고 신도 제접하길
언제까지 화합승가로 치부숨기나


수행하는 이들이여. 그러면서 일신의 안위를 위해 이것저것 눈치보고 비굴함을 인욕으로 포장하며 사는 것도 이제 힘들지 않습니까. 제발 수행의 가풍을 바꾸길 바랍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이 지경이 된 이유입니다.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신도들을 제접하길 바랍니다. 단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부처와 스님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음을 당당히 고백하십시오. 지금 이 시대는 더 이상 감출 수도 어물쩍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화합승가라는 이름뿐인 표어 속에 본인들의 치부를 감추며 케케묵은 60년대 정화방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폭력으로 사부대중의 열망을 누르려고 하십니까.

지금 승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성자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아우를만한 큰 스승이 있습니까. 큰 스승이 없더라도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승단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최소 종헌종법을 모든 구성원에게 추상같이 적용해 청정승단을 구현하고 있나요?


1만 승려 생계도 책임 못지는 종단
재정수입 사용처도 투명 않은 종단
염불 기도는 돈벌이, 참선은 위의
총무원이란 이름으로 죄짓지 말길

1만 명 정도의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많지 않은 승단의 구성원의 노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생계도 책임지지 못하는 종단. 내부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사찰입장료. 국가보조금. 보시금등이 모이고 그 재정이 어디에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도 모르는 종단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염불과 기도는 돈벌이로, 참선은 그냥 위의를 잡는 형식으로, 교학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무시함으로써 본인들의 게으름과 무지를 덮는 도구로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계종 총무원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와 석가모니 부처님 그리고 일체 제불 역대조사 그리고 신도들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승가이길 바랍니다.

불교와 종단의 이름이 더 이상 참담해 지는 것을 불교인의 한사람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인과도 연기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불교인이며 승려이며 지도자일 수 있습니까!

제방의 모든 스님들이 일어나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면 시대의 흐름에 또다시 휩쓸리는 역사가 반복되고 말 것입니다. 연기법을 무시하면 연기(煙氣)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요즘 상황에서 94년 개혁시 종정자리를 박차고 탈종하여 홀로 봉화토굴로 들어가신 서암 큰스님 같으신 눈 밝은 분이 그리워집니다. 후학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도 아직 명진 스님과 같은 실천하는 눈 밝은 스승이 있다는 것이 한국불교의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며 조속히 단식이 끝나고 이를 계기로 한국 불교와 종단에 새로운 변화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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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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