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청조(淸朝)의 공차(貢茶)

청(淸)나라 때에는 차(茶) 제조가 대부분 홍청(烘靑)과 초청(炒靑)1)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공차 제조방법이 더욱 섬세하고 정교하게 발전되어, 산차(散茶)2)더라도 찻잎의 형태가 그야말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오룡차(烏龍茶), 홍차(紅茶), 흑차(黑茶), 화차(花茶) 등 새로운 차 종류를 창제(創製)하게 되었다.

조정에 바치는 공차 생산지역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양자강 이남과 이북에서 명차 산지로 알려진 곳이라면 어느 곳이건 간에 대부분 생산하게 되었다. 청대(淸代) 사신행(査愼行)이란 사람이 한림원(翰林院) 편수관으로 있을 때 지은 《해기(海記)》의 기록에 의하면, 강희제(康熙帝) 연간에 공차 생산지는 강소, 안휘, 절강, 강서, 호북, 호남, 복건성 등 70여 곳의 부(府)와 현(縣)에 달했으며, 매년 공차로 바치는 차의 양도 무려 1만 3,900여 근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1근은 600g이니, 환산해 보면 7,800kg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여러 문헌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조정의 역대 황제는 차 마시기를 매우 즐기며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황궁 안에서도 차를 마시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고, 급기야 황궁을 관리하는 궁정(宮廷) 내무부(內務府)에서는 차(茶)만 전문적으로 마시는 ‘어차방(御茶房)’을 따로 설치해 둘 정도였다고 전한다.

강희(康熙) 50년(1711)과 강희 60년(1721)에는 청나라 조정에서 두 차례나 거대한 차연회(茶宴會)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차연(茶宴)은 일명 ‘천수회(千叟會)’3)라고도 하는데, 매번 차연을 거행할 때마다 참석하는 인원이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규모가 실로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차연이 끝난 후에는 관례에 따라 황제가 일부 훈구대신이나 혹은 공로가 있는 관원과 참석자들에게 어차(御茶)나 다기(茶器) 등을 상(賞)으로 하사하였다.

건륭제(乾隆帝)는 청나라 역대 황제 중에서도 특히 차를 좋아하고 즐겨마셨으며, 차문화 자체에 매우 심취했던 황제이다.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건륭제가 말년에 제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노후를 차생활로 유유자적하려고 하자, 원로대신이 극구 말리며, “나라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옵니다〔國不可一日無君〕.”라고 하였다. 건륭제는 “나는 하루도 차 없이는 살 수 없소이다〔君不可一日無茶〕.”라고 답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륭제는 차를 우려내는 샘물에도 조애가 깊어 직접 천하 명천(名泉)을 두루 섭렵하며 샘물을 감별하여 그 순위까지 직접 정할 정도였다.

건륭제는 재위 60년 간(1736∼1795) 매년 정월이면 차연(茶宴)을 거행하였다. 길일을 택해 중화궁(重華宮)에서 친히 주관하였다고 한다. 이 차연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가 제목을 정하여 운(韻)을 띄우면, 차연에 참가한 사람들이 서로 대련에 맞춰 시를 짓는다. 둘째, 황제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차연에 준비된 차를 마신다. 셋째, 시품(詩品)이 우수한 자를 선별하여 황제가 어차와 진귀한 상을 하사한다.

건륭 50년(1785)과 건륭 60년(1795)에는 천수연(千叟宴)의 규모를 더욱 크게 하여 참석자가 3,000여 명과 5,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가 즉위 38년(1699)에 3차 남쪽 순방 길에 올라 태호(太湖)에 이르렀을 때, 순무(巡撫) 송훈(宋葷)이 현지 제다의 고수인 주정원(朱正元)에게 ‘혁살인향(嚇殺人香)’4)이란 고급 차를 사서 진상하였다. 이에 강희제가 그 맛을 보고 난 뒤, “이렇게 좋은 차의 이름이 ‘혁살인향’이라니 우아하지 못하구나. 찻잎의 외형이 소라와 같이 생겼으니, ‘벽라춘(碧螺春)’이라 하는 게 좋겠다.”했다. 그 뒤로 ‘혁살인향’은 ‘벽라춘’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고, 이렇게 탄생한 ‘벽라춘’은 매년 어김없이 청나라 조정에 진공되었다.5)

청나라 건륭제가 즉위 16년(1751), 남쪽 땅을 순방하던 중 안휘성 휘주(徽州)의 명차인 ‘노죽포대방차(老竹鋪大方茶)’를 마시게 되었다. 이 차는 당시 노죽묘(老竹廟)의 화상(和尙)인 대방(大方)이 창안하여 만든 차이다. 조정에 진공된 후 건륭이 ‘대방’이라 명명하였고, 그 후 대방차도 매년 조정에 진공되는 공차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어서 건륭 18년(1753)에 강남 항주를 순방 중 용정(龍井) 사자봉(獅子峰)에 도착하여 유람하던 중 호공묘(胡公廟) 앞에 있는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만든 용정차(龍井茶)를 맛보니 그 향과 맛이 너무 독특하고 좋았다. 이에 건륭제는 곧장 호공묘 앞 차나무 18그루를 ‘어차’로 봉하였다. 이후 용정차의 명성은 날로 커져만 갔고, 매년 조공하는 양도 갈수록 많아졌다.

또 건륭 46년(1781)에 이르러서는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군산도(君山島)에서 생산되는 군산모첨(君山毛尖)이 공차의 반열에 들었다.

청대 조학민(趙學敏)이 저술한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는 보이차(普洱茶)를 “큰 것은 한 덩이가 다섯 근이나 되며, 마치 사람의 머리 크기 만해 ‘인두차(人頭茶)’라고 한다. 매년 조정에 공품으로 바치는데, 일반 민간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 보이차고(普洱茶膏)는 검기가 옻(漆)과 같고, 술을 깨는 데는 최고이다.”라 하였다.

청나라 때 황실에 조공으로 바쳤던 ‘인두차’는 지금까지도 몇 점이 전해져오는데, 현재 항주(杭州) 중국농업과학원 차엽연구소(茶葉硏究所) 내에 보존되어 있다.

그 외에도 청나라 때 공차 품목을 보면 그 종류가 대단히 많다. 사천(四川)의 몽정감로(蒙頂甘露)를 비롯해 절강(浙江)의 금화거암아차(金華擧巖芽茶)와 거암엽차(擧巖葉茶), 강서(江西) 수수현(修水縣)의 영홍진품태자(寧紅珍品太子茶), 안휘(安徽) 선주(宣州)의 경정녹설(敬頂綠雪), 귀주(貴州) 귀정(貴定)의 운무차(雲霧茶) 등이 있다.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조정과 관청에 바치는 공차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공차의 생산지가 확장되면 확장 될수록 차를 재배하고 제다하는 차농(茶農)들의 고통은 그에 정비례하여 늘어난다. 청대 진장(陳章) 같은 이는 《채다가(采茶歌)》를 지어 그 당시 조정에 공차를 바치는 차농(茶農)들의 고충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전하는 여러 문헌에 의하면, 섬서성(陝西省) 자양현(紫陽縣)에서 생산되는 자읍환진(紫邑宦鎭)의 모첨(毛尖)은 이미 동한(東漢) 말 헌제(獻帝) 연간(190~2210)에 공차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그러나 중국의 공차제도가 정식 제도로 확립된 것은 당대(唐代)부터다. 당대 이전의 공차는 사실 지방의 특산물을 황제에게 바치는 토공(土貢)의 성질을 띤다고 봐야 한다. 당대에 조공제도를 실시한 것은 조세제도의 또 다른 형태로 보면 될 것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차농들이 받은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와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차문화(茶文化)나 차업(茶業)에 종사하는 이들, 즉 차상(茶商)의 시각에서 볼 때 공차제도는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원동력과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역대 공차 생산 및 공차제도의 형성과 발전은 현재 중국의 산업화된 명차(名茶) 생산의 중요한 기초를 다지게 하였고, 나아가 중국 차 생산 발전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래도 필자는 호사(豪奢)의 차 생활이 아닌 다성(茶聖) ‘육우(陸羽)’의 ‘검지덕(儉之德)’의 차 생활을 추구하고 싶다.

주) -----
1) 홍청(烘靑)은 불에 쬐어 살청(殺靑)하는 것이고, 초청(炒靑)은 솥에서 볶아 살청(殺靑)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청(殺靑)’이란 열처리 과정을 통해 찻잎을 시들게 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2) ‘산차(散茶)’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찻잎을 쪄서 뭉치고 압축시켜 만든 단차(團茶:병차, 원차, 타차 등)와는 반대되는 의미로 ‘흩어진 찻잎’이란 의미이다. 즉, 지금 엽차(葉茶 : 잎차)를 의미한다.
3) 천수회(千叟會) : 천수연(千叟宴). 청나라 때의 노인잔치.
4) 혁살인향(嚇殺人香): 사람을 죽일 정도로 협박하는 향기, 즉 사람 죽이게 하는 향기로운 차란 뜻.
5) 청대(淸代) 왕응규(王應奎) 《유남수필(柳南隨筆)》, 청대 《야사대관(野史大觀)》권1 등에 기록.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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