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일본, 2016)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이야기 완결판입니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끝으로 당분간 가족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진짜로 일어날 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 뛰어난 가족 영화를 통해 감독은 일관되게 부모와 자식 관계를 탐색했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이어왔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는 냉랭한 편입니다. 부모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자식의 마음속엔 알게 모르게 부모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싫어했던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식은 깨닫습니다. 부모는 운명이고, 그 운명은 껴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주인공은 성장하게 됩니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인 료타(아베 히로시)는 철이 덜 든 어른입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은 작가였지만 지금은 흥신소 사설탐정이라는 직업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입니다. 불륜 현장에서 물증을 확보해 돈을 뜯어내거나 누군가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을 하면서도 집세 한 번 제때 내지 못하고 사는 형편입니다. 그러면서도 꿈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벼르는 소설은 15년째 진척이 없고, 소설 모티브를 찾기 위해 시작한 사설탐정 일이 오히려 그의 생계수단이 됐습니다.

료타는 처자식을 책임질 능력도 없습니다. 부인과는 오래전에 이혼했고, 양육비도 몇 달째 밀려 있습니다. 혼자 살아가기 힘든 이 남자는 늘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들른 집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 있나, 하고 집안 곳곳을 뒤지고, 누나를 찾아가 돈을 꾸려다 망신만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처 주변을 맴돕니다.

그런데 그는 유품을 찾아 집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또 누나를 찾아갔다가 돌아간 아버지와 만나게 됩니다. 서랍 속에서 한 뭉치의 전당포 영수증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 또한 평생 변변한 직장 없이 집에서 값나갈 만한 물건을 훔쳐 전당포에 맡기고 푼돈을 빌려 살았던 것입니다. 누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료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도 똑같이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료타는 아버지를 싫어했습니다. 밖에서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면서 집 안의 돈을 훔치는 아버지를 좋아할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엄마의 한숨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자식으로서 그런 아버지에 대해 원망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를 어느덧 자신이 꼭 닮아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일까요?

아버지를 계속해서 미워한다는 건, 곧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처럼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잘하고 싶지만, 인생이 자기 뜻대로 안 됐을 뿐입니다. 아버지 또한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한 세상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하면서 자식들은 한 뼘씩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질구질한 인생과 화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료타의 현재는 사설탐정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일을 부정했습니다. 흥신소 소장이 이쪽에 재능이 있다고 부추기면서 아예 말뚝을 박으라고 했을 때도, 그는 자신은 단지 이 일을 소설 모티브를 얻기 위해 잠시 하는 일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잠시’가 천직이 돼버린 지 오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을 임시직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업에 대한 부정뿐만 아니라 전처에 대한 집착 또한 연장선입니다. 아내와 살 때 그는 아내와 아이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이혼했는데, 이제야 모든 걸 되돌리려고 합니다. 손에 닿는 곳에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지금에서야 그것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소설가라는 이루지 못한 꿈을 내내 ㅤㅉㅗㅈ으며 사는 것처럼 떠나버린 아내 또한 그의 결여를 의미하고, 그는 그것을 되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아내를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아들까지 이용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아들을 만나는데, 그것도 양육비를 제때 못 주는 바람에 계속 만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모하게도 아들을 자신의 엄마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들을 핑계로 전처를 엄마 집에 오게 만들어 어떻게 잘 해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처인 쿄코(마키 요코)도 엄마인 요시코(키키 키린)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마침 이 날은 일본에 엄청난 태풍이 휘몰아쳤고, 아들의 의중을 알고 있는 엄마는 며느리를 하룻밤 재워서 보내려고 애씁니다. 그 하룻밤을 보내면 아들 내외가 다시 합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의도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 하룻밤을 보내면서 시어머니 요시코 또한 며느리와 자신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료타 역시 쿄코의 마음이 확고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는 떼쓰는 아이처럼 막무가내로 아내에게 집착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현실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아내를 이제는 정말로 떠나보냈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파트 앞마당은 눈부시게 깨끗하고 밝고, 세상 만물은 모두 새로 태어난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집착을 버리면 못 살 것처럼 여겼는데 오히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다.”

엄마 요시코는 며느리와 헤어져 방황하듯 살아가는 아들을 걱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는 밤 전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떠나보내게 됐는데 료타는 훨씬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벼루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려다가 그곳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그 벼루가 마치 아버지가 된 것처럼 가슴에 고이 안고 나왔습니다. 비록 전처에게 양육비는 주지 못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삶의 가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결국 비록 자신의 삶이 자기가 원하는 것처럼 그럴듯하지 않지만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료타와 아들 싱고, 그리고 전처 쿄코가 나란히 앉아 전철을 타고 가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아버지를 싫어했던 료타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놓은 벼루를 바라보며 회한에 잠겼습니다. 과거의 인물인 아버지는 현재의 료타와 꼭 닮았는데, 료타가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벼루를 그윽하게 바라본다는 뜻은, 자신의 현재를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싱고는 이전의 료타를 닮았습니다. 그는 료타가 쥐어준 복권을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면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까지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지도 모를 복권에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싱고는 료타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가 불만스럽습니다. 할머니를 자주 못 보는 것도 싫고, 목소리 큰 엄마의 남자친구도 싫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료타와 꼭 닮은 모습입니다.

료타는 자신의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닮아있고, 아들 싱고는 또 료타를 닮아있고, 이렇게 자식은 부모의 복사본처럼 닮아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닮은 자식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운명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합니다. 료타가 아버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어른으로 성장한 것처럼 지금은 비록 무능한 아버지를 부정하지만 싱고 또한 언젠가는 료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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