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2009년 11월 8일 1차로 친일행위자 4,389명의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며 독립군 소탕에 앞장섰던 박정희 전 대통령,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해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지휘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등 우리들 귀에 익은 다수의 유력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이 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의 유족이나 친인척들이 앞다투어 명예훼손 소송을 내는 등의 예상되는 반발 작태는 불을 보듯 눈에 선하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네들의 목소리가 그렇듯이, 말도 안되는 소리로 자기 합리화·정당화시키며 온갖 연줄을 끌어다 부인하려, 축소하려, 삭제하려 가여운 애를 쓸 것이다. 합리화는 그저 정당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그 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의 포장에 지나지 않건만.

일제 굴욕에서 벗어난 지 60여년이 훨씬 지났건만 그 더러운 탐욕의 끈질김은 어데 비할 데가 없어 보이고 고해(苦海)에 표류하는 외로운 돛단배는 마냥 쓸쓸해 보인다. 항일세력의 후손은 월세방을 헤매고 친일세력의 후손들은 정·재계를 주름잡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라 할 수 있다. 2004년 초 네티즌 중심으로 전개된 국민성금운동 같은 민초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다각도의 압박과 위협에도 의연히 제 할 일에 충실했으리라. 지난 8년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도 발본색원하려는 그들의 초심이 금강처럼 굳세길 빌어본다.

돌아보건대, 이러한 굴욕의 역사는 제대로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마치 무명(無明) 때문에 혹(惑)·업(業)·고(苦)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민초들이 바른 식견을 갖추고 있다면 어느 권력자가 지록위마(指鹿爲馬)라 하겠는가. 깨달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깨달음은 어느 하나하나에 대해 사실대로 간택(簡擇)하는 것 다름 아니다. 버려야 할 것과 지녀야 할 것을 제대로 간택한다면 이러한 역사의 굴곡은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잡아함》26권을 보면,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않은 것을 사실대로 알고, 죄 있는 것과 죄 없는 것을 사실대로 알며,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바르게 알고, 비열한 것과 훌륭한 것을 사실대로 알며,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못한 것을 알고, 분별과 무분별을 알며,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과 인연으로 일어나지 않은 법을 사실대로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힘이다”고 했다.

깨달음은 내생 내겁에 있는 것도 아니요, 8만 유순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태에 대해 하나하나 바르게 간택하는 그 곳에 깨달음이 있다. 그리고 그 중생들의 한 모습 한 모습을 제대로 알고 가려내는 것으로 전도망상의 사회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법진 스님/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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