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세상을 잘 보고, 소리를 잘 듣고, 냄새를 잘 맡고, 맛을 잘 보고, 촉감을 잘 느끼고, 의식을 잘 하는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행세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중생들의 세계에서도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은 대개 육근이 잘 갖추어져 있고, 오온이 충실한 사람들이다. 연애인을 보더라도 자신을 포장하고 가꾸는 재주가 남달라서 육근과 오온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

중생들은 이와 같이 오온이 구족하고 육근이 잘 포장되어 남보다 뛰어나기를 좋아하고, 또 육근이 뛰어난 사람들을 좋아하며, 육근으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에 유혹당하고 애착하게 되었다. 육근으로 보이고 들리는 대상에 탐착하다보니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동물보다도 근심과 걱정, 괴로움이 많지 않은가 여긴다.

경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날 적에 모든 근(根)이 구족하기도 하고, 구족하지 못하기도 하다. 모든 근이 구족한 사람은 대상을 보고 탐심을 내어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같이 탐심을 내는 것을 탐애(貪愛)라 하고, 지나치게 탐심을 내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탐애와 무명 이 두 가지 때문에 마주하는 경계에 마음이 전도(顚倒)되어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하다고 하고, 내가 없는 것〔〔無我〕〕을 내가 있다고 하며, 낙이 없는 것을 즐겁다고 하고, 부정(不淨)한 것을 청정하다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전도된 마음으로 때로는 선행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처럼 탐욕과 무명이 원인이 되어 번뇌가 업을 짓고, 업이 다시 번뇌를 만드는 것을 속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속박이 오온(五蘊)을 만들고 유지하게 한다. 어리석은 중생은 뛰어난 육근을 가지고도 무명심과 애탐으로 대상을 취하므로 스스로를 옭아매어 뇌란에 빠진다. 이렇게 속박하면 그 과보로 결국 욕계·색계·무색계의 생사고해를 윤회한다.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사람이 만일 부처님이나 불제자나 선지식을 만나서 대승경을 듣고 좋은 경계를 잘 관찰하여 진실한 법을 알고, 여기서 큰 지혜가 열리면 대상을 바로 보는 바른 지견〔正知見〕이 생기게 된다. 바른 지견이 열리면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자신이 그동안 생사고해에서 지은 악업을 참회하게 된다. 참회하는 마음을 내었으므로 여태까지 대상에 전도되었던 것을 싫어하고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대상에 대한 탐심을 파하게 된다. 탐심을 파하면 바른 사유〔正思惟〕가 일어나고 내지 바른 선정〔正定〕이 생겨서 팔정도를 닦으니 생사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생사를 멸하였으므로 멸도(滅度)를 얻었다고 하고, 오온을 멸하였다고 한다.

오온을 멸하여 생사고해에서 멸도를 얻었다면, 그동안 오온 속에서 우리를 속박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선남자여. 번뇌의 사슬로 오온을 속박하나니, 오온을 여의고 따로 번뇌가 없고, 번뇌를 여의고 따로 오온이 없느니라. 선남자여. 기둥이 집을 지탱함과 같아서 집을 여의고 기둥이 없으며, 기둥을 여의고 집이 없나니, 중생의 오온도 그와 같아서 번뇌가 있으므로 속박이라 하고 번뇌가 없으므로 해탈이라 하느니라.”

우리는 오온의 색온(色蘊)·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薀)으로 살아가는데, 애탐과 무명심의 번뇌가 있으면 끊임없이 대상을 향하여 전도심을 일으켜 취하게 되고, 고스란히 다시 오온을 형성해 뇌란에 빠지게 되므로, 무명과 애탐의 사슬로 오온을 속박한다. 따라서 번뇌를 여의고 따로 오온이 없다고 하고, 마치 기둥과 집의 관계와 같다고 한 것이다.

우리의 오온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온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온·상온·행온·식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명색(名色)이 중생을 속박하고, 명색이 멸하면 중생이 없다고 한다. 십이연기의 환멸(還滅)법에서도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입이 멸하고 내지 생·노사가 멸한다고 한다. 곧 명색이 멸하면 중생이 없고, 명색을 여의고 따로 중생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명색이 중생을 속박하고 중생이 명색을 속박한다고 할 수 있어서, 만일 명색을 여의면 곧 해탈이요, 그러므로 중생이 해탈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해탈을 얻은 이를 보통 아라한·연각·보살·부처라 한다. 그런데 이들도 모두 중생에서 해탈을 얻은 이들이다. 우리 중생이 명색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중생도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색이 있는 것을 속박이라 하고 여기서 벗어나면 해탈이라 하는데, 아라한 등이 명색을 여의지 못한 것도 속박이라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경에서는 두 가지 해탈을 들고 있다. 하나는 자단(子斷)이고, 다음으로는 과단(果斷)이 있다. 자단은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종자인 번뇌를 끊음이고, 과단은 과거의 업에 의해 일어난 과보인 현재의 고과(苦果)까지 다 끊은 것이다. 아라한은 이미 생사의 번뇌인 견혹과 사혹을 끊었으므로 자단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지은 번뇌의 과보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과보의 속박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명색의 속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등불이 있을 때 기름이 다하기 전에는 밝은 빛이 꺼지지 않거니와 기름이 다하면 불빛이 꺼지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기름은 번뇌에 비유하고 등불은 중생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이 번뇌의 기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못하지만, 만일 번뇌를 끊는다면 기름이 다하여 열반에 드는 것과 같다.

다만 아라한들이 열반을 얻었으나, 아직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여 과보의 속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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