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 스님이 18일 단식에 돌입했다. 조계종 적폐청산 제4차 촛불법회에서 단식 의지를 밝혔던 스님은 18일 조계사 옆 우정국 앞에서 “자승 조계종총무원장이 퇴진하고 (조계종의) 적폐가 사라질 때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피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명진 스님의 단식이 사부대중의 조계종 적폐청산 염원 의지를 더욱 타오르게 하는 횃불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계종은 16일 명진 스님의 제적을 확정했다. 표면적으로는 ‘언론인터뷰와 법회 등에서 조계종과 총무원 집행부를 비하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알만한 불자들은 △용주사 주지 은처자 의혹 △마곡사 돈 선거 △적광 스님 폭행 사건 △동국대 사태 △불교언론 탄압 등 자승 총무원장 재임 중 일어난 각종 적폐를 비판, 미움을 샀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명진 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행자생활을 했다. 출가도량인 백련암은 훗날 조계종 종정에 오르는 성철 스님의 수행처다. 또 은사는 1994년 조계종 분규 당시 개혁회의 때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을 안정시킨 후 걸망하나 메고 조계사를 떠났던 탄성 스님이다. 이런 걸출한 스님들의 영향을 받아 문경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에 매진했다. 하지만 1986년 군부정권의 독재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 ‘9.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를 주도한다. 이후 1987년 불교탄압대책위원장, 이듬해 대승불교승가회장을 역임했다. 1994년 종단 개혁 때도 앞장서는 등 종단이 위난에 처할 때마다 선봉에 섰다.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역임 후 봉은사 주지를 맡았을 때는 투명한 재정운영과 함께 매일 새벽예불부터 참여하는 1000일 기도를 실천해 신도를 10배로 늘려놓기도 했다.

이런 스님의 승적을 조계종 집행부가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탈한 것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산문의 출입마저 막았다. 18일 조계사를 찾은 명진 스님은 단식에 앞서 대웅전 부처님을 참배코자 했다. 그러나 ‘한기중(명진 스님의 속명) 처사님, 단식은 단식원’, ‘적폐 기호1 한기중’ 따위의 종이피켓을 든 조계종 종무원들의 저지에 막혔다.

불자라면 조계종 승적 여부를 떠나 길가다가 승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합장인사를 하는 게 불자의 예(禮)다. 종무원들의 이 같은 대응은 도를 지나쳤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계율은 사라지고, 폐단이 누적된 조계종 집행부에게 부처님이 설하신 ‘인과법’의 엄중함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속명을 들먹이는 조계종 집행부의 치졸한 행태와 달리 단식천막에는 사회지식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18일 단식농성장을 찾은데 이어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조영선 변호사, 가수 전인권 씨, 도올 김용옥 선생,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응원방문이 잇따랐다. 조계종의 적폐청산을 갈망하는 여론이 불교계를 넘어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 하겠다.

지난 9일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한 전국선원수좌회 의장 월암 스님은 제3차 촛불법회(8월 14일)에서 “보조 선사는 〈권수정혜결사문〉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우리 불교(조계종)는 땅에 쓰러졌다. 우리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자.”고 호소한 바 있다. 고인 물이 썩는 게 자연의 이치라면, 비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단체가 부패하는 건 세상의 이치다. 조계종 사부대중은 종단의 곪을 대로 곪은 적폐를 이번 기회에 청산하지 못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