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한반도 개념 없어…백제·고구려도 외세
‘태평가’, 당을 꼭두각시 만들려고 만든 외교문서
 

<태평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개창하니, 높고 높은 황제의 모책(謀策)은 더욱 창성하여진다.
전쟁이 끝나니 군사들은 안정을 얻게 되고, 문치를 숭상하니 백왕(百王)의 뒤를 잇게 되는 터전을 이루셨다.
하늘까지 다스리니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잘 다스리니 물체마다 (이슬을 머금듯) 광채를 머금었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비교될 만하고, 순환하는 (복된) 운수는 우당(虞唐) 즉 (태평스러운) 요순시대로 향한다.
(휘발리는)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며 빛나고,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변방 밖의 오랑캐〔外夷〕로서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칼날에 엎어지는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淳厚)한 덕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이나 다 불며,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다투어 상서로움을 바친다.
사시(四時)는 옥촉(玉燭)과 같은 태평한 세상으로 순탄하고, 칠요(七曜)는 널리 만방을 돌아다닌다.
큰 명산에서 보필할 재상을 내리고, 임금은 충량한 신하에게 종사를 맡긴다.
오제삼황(五帝三皇)의 덕을 하나로 하여, 우리 당나라 임금을 밝게 한다.


신라의 제28대 진덕왕의 이름 진덕 가운데 ‘진(眞)’은 불경 《방광대장엄경》 권3 <승족품>의 진종설화에서 채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중생심의 근원이 되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인 진여(眞如)의 ‘진’이기도 하다. 그런 불교적 성격을 띤 진덕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용비어천가’를 부른 것이다. 오제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말하고 삼황은 복희씨(伏犧氏),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말한다. 이런 전설적인 왕으로 칭송된 고종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진덕여왕이 용비어천가, 아니 <태평가>를 작사·작곡해서 올린 이유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기 위한 것인가? 당시 두 나라보다 약세였던 신라가 외세를 빌어 한반도의 통일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반도라는 개념이 없었고 신라에게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도 당나라와 같은 외세였다. 좀 가까운 외세가 고구려와 백제였고 먼 외세가 당나라였다.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이, 신라도 당을 이용해서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려 한 것이다. 위의 <태평가>는 아부의 극치지만 실제로는 당나라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한 치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외교문서이다.

신라의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는 654년부터 661년까지 재위했다. 태종은 묘호이고 무열은 시호이며 이름은 춘추이다. 53세에 진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선덕·진덕왕을 보필하여 삼국통일을 도모하였다. 특히 당나라로 인질로 간 것인지 외교사절로 간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과 나당 군사동맹을 맺는 등 대당 외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김춘추가 <태평가> 제작에 관여한 것으로 봐도 될까?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인 소정방은 13만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다.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야 같은 민족이고 같은 국민이지만 당시의 영토의 개념은 좀 달랐을 것 같다. 전쟁을 하고 살상과 강간, 약탈 등 범죄가 일어나는 판국에 ‘동포’라는 개념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신라에게 있어 당은 전략상 필요한 힘센 이웃에 불과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어쩌면 바른 역사관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천적은 있다. 외교적 재능이 뛰어난 춘추공이 넘어야 할 산으로는 알천공이 있었다. 그리고 적으로 둬서는 안 될 사람 바로 김유신이 있었다.

(진덕)왕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은 남산(南山)에 있는 오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곤 하였다. 이 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다. 그런데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서 윗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모든 공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무지 황당하기까지 한 위의 기사로 우리는 당대의 정치상황을 정말 많이도 알아낼 수 있다. 사료 비판은 탐사역사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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