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의 관계는 부단히 사고의 과제가 되어 왔다. 문자는 흔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된다. 달을 보도록 지시하는 것이 문자라는 손가락이 본래 나타내는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화두는 어떤 달을 가리키는 문자일까? 하지만 화두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달도 없다는 사실에 봉착하게 된다. 헛손가락질에 허구의 달! 파고들어 분석한 끝에 진실을 가려내라고 가르친 선사가 일찍이 없었던 까닭은 그 점에 있다. 그들은 또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눈앞에 드러나 있는 그대로가 진실이지만 조금이라도 헤아리면 즉시 어긋난다.” 그것은 어떤 옷도 입지 않고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지만 마음이라느니 부처라느니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이에 그들은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를 시험 삼아 던진다. 이것은 마음에 무수히 박혀 있는 의미들과는 하등의 상관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물들지 않은 눈동자에 오로지 의문으로만 비치는 하나의 낯선 영상과 같다.
옛날 어떤 노선사가 암자의 문에 마음 ‘심(心)’ 자를 써 놓고, 창에도 마음 ‘심’ 자를 써 놓으며, 벽에도 마음 ‘심’ 자를 써 놓았다.
안팎의 모든 존재가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철칙을 곳곳에 새겨두기 위한 의도였을까? 하나가 모든 것으로 통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열리며, 하나의 개별자가 다른 모든 하나의 개별자로 걸림 없이 출입하는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마음 심자와 같이 중심적 위치를 점유하지 못할 문자는 없다.
용당주(龍唐柱)가 “문에는 창이라 쓰고, 창에는 벽이라 쓰며, 벽에는 문이라 쓰리라”고 한 말도 그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갈고리 모양에 세 개의 점이 찍혀 있는 심(心)은 이런 따위의 철학적 부호가 아니다. 심(心)은 심(心)이라는 모양으로 분명히 거기에 붙어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달은 따로 없다.
그래서 법안(法眼)은 이렇게 재구성했다. “문에는 단지 문(門)이라 쓰고, 창에는 단지 창(窓)이라 쓰며, 벽에는 단지 벽(壁)이라 쓴다.” 낱낱의 글자를 그것과 부합되는 실물에 이름표처럼 달아 놓은 것이라면 천자문에 입문하는 아동의 수준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법안이 차별된 존재를 차별 그대로 보는 입장에 서있었다고 해석한다면 법안의 덫에 제대로 걸려든 꼴이다.
이렇게 설정된 법안의 권역에서 현각(玄覺)은 다음과 같이 벗어났다. “문에다 반드시 문이라 쓸 필요가 없고, 창에도 반드시 창이라 쓸 필요가 없으며, 벽에도 반드시 벽이라 쓸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글자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것을 목격하면 될 일이지 거추장스럽게 이차적인 문자로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현각의 표면적인 뜻이지만, 그것도 그의 의중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이들이 쓴 몇몇 글자를 두고 벌어지는 오해는 모두 그 ‘헛손가락질’에 미혹되어 따라다니는 탓이다. 이들은 하나의 시험문제로서 그 글자를 제시했지만 정해진 해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명백한 해답이 없다고 하여 제시된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자신의 견해를 해답으로 내놓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노선사에서 시발된 다음부터 끊임없이 문제에 문제로 맞서는 방식이 이어졌으며, 앞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탐색하며 머뭇거린 경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손가락의 지시를 받고 끌려 다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별봉(別峰)은 “한 글자를 세 번 쓰다보면 까마귀 오(烏)나 어조사 언(焉) 등의 글자가 말 마(馬) 자로 잘못 쓰여진다”라고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이 의미를 밝혔다. 선대의 조사들이 고안한 화두의 장치들이 문자의 뜻에 알맞은 그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잘못 전해지는 착각을 가려낸 것이다.
암자의 노선사가 문과 벽에 마음 심(心) 자를 써놓은 의도가 무엇일까? 무명혜경(無明慧經)의 게송이다. 

남을 가르침에 속을 다 보여주어선 안 되니,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관찰해 보라.
옛 사람의 진실한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면,
세상을 종횡으로 놀리며 하늘까지 속이리라.

爲人不得賣心肝
百尺竿頭進步觀
?透古人眞實意
縱橫海內把天瞞 

노선사는 마음 ‘심’ 자에 자신의 심장과 간을 모두 담아서 팔았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백척간두에서는 문자와 생각으로 나갈 길이 모두 차단되어 팔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 무엇을 팔아먹었단 말일까? 그곳에는 있지도 않은 마음 심자와 벽 벽자 등의 품목을 잠시 대여해 왔을 뿐이다. 이 맥락에서 선사들은 “우리 왕의 창고에는 이러한 칼이 없다”라고 말하곤 한다.
동서남북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하늘까지 속이는 일은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 자들이 ‘악!’하는 외마디 소리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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