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信心)의 종류

364.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으며 불자가 해야 할 바의 도리를 역시 믿으며 위없는 큰 깨달음1)을 믿어야 할지니라. -화엄경(華嚴經)

365. 보살은 일체 법이 공함[空]을 믿으며, 일체 법이 모양이 없음[無相]을 믿으며, 일체 법이 원이 없음[無願]을 믿으며, 일체 법이 짓는 일 없음[無作]을 믿으며, 일체 법이 분별없음을 믿으며, 일체 법이 의지한 데 없음을 믿으며, 일체 법이 헤아릴 수 없음을 믿으며, 일체 법이 위가 없음을 믿으며, 일체 법이 초월함이 없음을 믿으며, 일체 법이 남이 없음을 믿을 지니라. - 화엄경(華嚴經) 2)

366. 신심을 대략 설명하건대 넷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첫째, 근본을 믿는 것이니 진여법을 요념(樂念)하기 때문이다. 둘째,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마음에 새기어 가까이 하여 공양하고 공경하며,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기 때문이다. 셋째, 법에 큰 이익 있음을 믿는 것이니 여러 바라밀들을 늘 마음에 두어 수행하기 때문이다. 넷째, 승가가 바르게 닦아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하는 것을 믿는 것이니, 여러 보살들을 늘 가까이 하며 배움을 구하여 여실히 행하기 때문이니라. -기신론(起信論)

367. 상주의 이치를 믿어 이름하여 신심이라 하니라. -능엄경(楞嚴經)

368. 믿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들어서 일으키는 믿음이고, 둘째는 생각해서 일으키는 믿음이다. 그 사람의 신심이 만약 들어서 일으키고 생각함이 없는 경우라면 이것을 갖추지 못한 믿음[信不具足]이라 한다.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도가 있음을 믿음이요 둘째는 도를 깨친 사람을 믿음이다. 만일 이 사람의 신심이 오직 도가 있음을 믿고 도를 깨친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갖추지 못한 믿음[信不具足]이라 하니라. -열반경(涅槃經)

369.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을 믿고 의지하여[信向] 마음에 오염된 집착을 일으키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여러 부처님들께서 설법하신 그 성상(性相)이, 모두 공함을 믿고 이 법을 신해(信觧, 信解, 교법을 믿고 아는 것)할 수 있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이다. 믿고 즐기는 마음[ 信樂心]이 생겨 5욕락(五欲樂, 5경에 상응한 욕망)을 탐내지 않고 이 믿고 즐기는 바를 성취한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여러 부처님들께서 중생에게 법을 베푸심을 믿어 나 역시도 따라 배우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보시를 행함을 믿거나 자신을 버리면서도 베푼다는 상을 내지 않는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여러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여 그 마음에 더럽고 탁함이 없으며 망심을 여읨[無心法]을 또한 믿는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6정(六情, 6근)을 지켜 욕구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 가르침을 신해하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믿지 못하는 여러 중생들을 믿음으로써 세워 일으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제행(諸行,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모든 존재)의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를 믿어 이 믿음의 힘을 성취한다면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무루성계(無漏聖戒)가 허망된 말[戱論]이 아님을 믿어서 삼매를 갖추는 것, 이것이 굳은 믿음[堅信]이다.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

[각주]
1)불과(佛果)의 지혜를 정각(正覺) 혹은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풀이해보면 정(正)은 ‘올바름’을, 등(等)은 ‘치우치지 않음’을, 각(覺)은 ‘일체법을 아는 지혜’를 뜻한다. 진실하고 평등한 이치를 깨달아 증득한 가장 뛰어난 지혜 또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경을 읽을 때 흔히 접하게 되는 표현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구역(舊譯)에서는 이를 표기한 것이다. 신역에서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라 번역하게 되는데, 아뇩다라는 ‘무상(無上)’, 삼먁삼보리는 ‘정변지(正遍智)’ 혹은 ‘등정각(正等正覺)’으로 번역된다.
2)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에서 공덕림보살이 언급한 <보살마하살의 믿는 장[信藏]>에 대한 내용이다. 무원(無願)은 지켜야 할 바의 계를 다 지키고 해야 할 바의 수행을 전부 닦은 경지이다. 삼매로 이를 표현한다면, 깊고 얕은 차례와 출입하는 차례가 있으나 이를 초월한다. 모든 법을 관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관혜(觀慧)와 더불어 구족되는 정심(定心)이라 하겠다. 무작(無作)의 해탈문이자 바랄 것 없는 삼매이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의지해야 할 바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이므로 다만 언설로 표현할 뿐이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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