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순 석방 청하기 위해 당에 사신 보내
진덕여왕대를 기준으로 신라사 시대 구분


제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태평가(太平歌)>를 짓고 비단을 짜서 수놓았다. 사신을 당(唐)에 보내 바치게 하였다. 당나라 임금이 기뻐하며 그것을 포상하고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다른 기록〔一本〕에는 “춘추공(春秋公)이 사신으로 건너가서 청병케 하자 태종(太宗)이 기뻐하며 소정방(蘇廷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현경(現慶) 연간 이전에 이미 춘추는 즉위하였고, 현경 연간 가운데 경신(庚申)년은 태종대가 아니라 당 고종(高宗)대이며, 아울러 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 수를 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 때의 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아마도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하여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이다.


28대 진덕여왕이 <태평가>를 비단에 수놓아 사신을 당에 보내 바치게 한 것의 연대가 미정이다. 즉위하고 바로인지 몇 년 지나서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여하튼 이때는 청병이 아니라 김흠순의 석방을 청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낸 것이고, 당나라 임금이 기뻐서 진덕여왕을 계림국왕으로 책봉했다고 《삼국유사》 각주의 찬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다른 기록에서 춘추공이 사신으로 가서 청병하고 태종이 소정방을 보내기로 한 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소정방이 신라에 파병 온 현경 연간의 경신년은 당나라 고종대로 태종대의 일도 아니라고 하고 있다.

진덕여왕은 신라의 제28대 왕으로 생년은 미상이고 재위 기간은 647년∼654년이다. 이름은 승만(勝曼)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의해 즉위하였다. 650년에 중국의 의관제도와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왕통이 끊어졌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이 왕대까지를 상대(上代)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중고(中古)라 시대를 구분해 말한다. 이런 신라사 시대 구분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진덕여왕, 특히 즉위 초의 연대 비정은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덕여왕은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킨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냈다. 이로써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고 전한다. 즉위한 647년 정미년은 당 태종대로 정관 21년에 해당한다. 아울러 김춘추가 당나라에 간 648년은 무신년으로 정관 22년에 해당한다. 춘추공 즉,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것은 654년 갑인년으로 영휘 5년이며, 현경 원년은 656년으로 태종무열왕 3년이다. 그리고 현경 5년 경신년인 660년에 소정방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한다. 《삼국유사》 이 조목의 내용과 뭔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진덕왕 원년(647) 2월’ 조에 의하면, 진덕여왕은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삼국유사》의 “계림국왕(鷄林國王)”이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삼국유사》가 틀리고 《삼국사기》가 맞다는 말은 아니다. 아울러,《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진덕왕 4년(650) 6월’조에는 <태평송>을 수놓은 비단을 당 고종(재위 649~683)에게 바친 김법민(金法敏)에게 종3품의 직사관인 태부경(太府卿)을 제수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결국 진덕여왕이 계림군왕에 책봉된 것은 알 수 없지만 태평가를 비단에 수놓아 보낸 것은 650년의 일이며 사신은 김법민이라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듯싶다.

김법민은 태종무열왕의 아들로 후대에 문무왕으로 즉위한다. 결국 650년에 진덕여왕이 계림국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 다른 사료로 증명이 안 된다. 그렇다고 계림국왕이 되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아울러, 문무왕대 김유신(金庾信)의 아우 김흠순은 668년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하는데 공이 컸다. 669년 5월에 김양도와 함께 당나라에 사죄사로 갔다가 김양도는 투옥되고 김흠순은 억류된 바 있다고 <의상전>에 전한다. 이때 의상에게 귀국하여 당 고종의 신라 침략에 대한 정보를 전하도록 하여 670년에 의상 대사는 서둘러 귀국한다. 결국 김흠순이 옥에 갇혀 석방을 요청한 것은 진덕여왕과는 전혀 다른 왕대의 일이어서 《삼국유사》의 연대 비정은 상당히 곤란하다. 연대 비정이 가장 중요한 사료적 가치의 기준인데 그 기준에 한참 못미친다. 결국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는 역사서라고 하기 보다는 불교설화집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많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며, 앞으로도 이 점을 두고 《삼국유사》를 해설해 보고자 한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