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굿따라 니까야≫의 <장로품>에 불교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리더십이 언급되어있다. 여기서 그것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만 소개하면 ≪앙굿따라 니까야≫(AN5:82)에서 붓다는 장로비구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법을 언급했다. 즉 “탐욕을 여의고, 성냄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고, 위선을 여의고, 악의를 여의는 것이다.”(AN. Ⅲ. 111)고 했다. 이것은 장로비구가 갖추어야 할 출가자로서의 도덕적 자질에 관한 덕목이다. 모름지기 출가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위선, 악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사부대중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즉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 둘로 양분되어있다. 한국의 승려들은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자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승가 내부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글의 법칙만이 적용되고 있다. 청정한 승가라는 수행 공동체가 무너져 버렸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의 불만과 불평은 폭발 직전이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 않기 위해 수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너도 나도 권력에 줄을 대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이러한 불교계의 고질적 병폐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시대가 지도자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상, 다시 말해서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지도자상은 ‘화합형’ 혹은 ‘포용형’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이다. 자승 총무원장 재임 8년 동안 승가화합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오직 아군과 적군만 남았다. 만일 적군으로 판명되면 가차 없이 보복을 자행했다.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대한 언론탄압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탈종교시대 한국불교는 사부대중이 화합하여 오직 포교에만 전념해도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타종교는 날로 성장하는데 불교는 점차 위축되어가고 있다. 불교신자 3백만 명 감소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불교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예전 같지 않다. 뜻있는 불자들이 승려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하나 둘 떠나고 있다. 앞으로 텅 빈 절간, 신도 없는 절들이 수없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은 친자승파와 반자승파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다.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는 연일 일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해종 세력’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적폐 세력’이라고 서로 규탄하고 있다. 두 세력 간의 반목과 갈등의 골은 너무 깊게 파였다. 이제 그 누구도 두 세력 간의 반목과 갈등을 쉽게 봉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 ‘포용형’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 지도자가 나와서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고, 화합의 길로 이끌어 가야만 한다. 모름지기 통 큰 지도자는 적군의 수장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조금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고 해서 보복하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특히 자비를 표방하고 있는 불교의 지도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바로 보복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아부하는 참모보다 쓴 소리[苦言]하는 참모를 더 신뢰한다. 반면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역사의 죄인이 된 사람들은 고언하는 참모를 물리치고 간신배들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지도자상은 많이 배우고[多聞], 계율을 잘 지키고[戒具足], 지혜로운 자로서, ‘포용형’ 리더십으로 사부대중을 화합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지도자라야 할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는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된 관심 분야는 불교사회사상이다. 현실을 떠난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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