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看話禪)은 고려 수선사(修禪社) 제1세 보조 국사 지눌(普照 國師 知訥, 1158∼1210)에 의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며, 이후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가 입적한 후 3년이 되는 해인 1166년(건도 6년) 8월에 경산(徑山) 묘희암(妙喜庵) 명월당(明月堂)에서 최초로 그의 어록(語錄)이 간행된다. 이후 대혜의 어록은 우리나라에서는 1387년(홍무 20년)에 최초로 간행된다. 따라서 지눌은 아마 중국에서 간행된 최초의 본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1198년 열람한 것 같다. 약 30년의 기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눌은 우리나라에서 《대혜어록》을 입수한 최초의 인물인 것으로 사려된다.

주지하다시피 지눌은 대혜 종고의 어록을 통하여 마지막 마음공부의 전기를 이룬 후,1) 생애 후반부의 저술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 이르러 간화선을 본격적으로 설하고 있다.2)

지눌과 간화선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간화선을 접한 이후에 지눌이 자신의 초기 선법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고 여겨서, 말년의 저작들을 통하여, 이 오류들을 반성하고 수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말년 사상은 초기의 사상과 상충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교일치(禪敎一致)로 대표되는 지눌의 초기 선사상은 그 불교사적 의미를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고, 오로지 말년의 저작들에서 표방된 간화선만이 그의 선사상을 대표하게 된다. 이 경우 지눌은 한국에 간화선을 도입하고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간화선을 개진하기 시작한 사상가로도 자리 매김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한국불교사에서 그의 사상가로서의 독창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 부분 유실된다.

다른 하나는 간화선을 접한 이후에도 지눌은 자신의 초기 선법에 대하여 오류가 있다고 여긴 적이 없으며, 단지 간화선을 그의 선법을 보강하는 좋은 재료로 여겼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돈오점수와 선교일치는 여전히 그의 대표적인 선적 사유체계가 된다. 단지 간화선은 보완책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동시에 한국불교사에서 그의 사상가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는 흔들림이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문제가 또 생긴다. 무엇보다도 간화선 사상과 지눌의 선사상 간의 상관관계가 문제가 되어서, 지눌을 간화선사로 볼 수 있는가? 한국의 대표적인 선이 간화선인가? 간화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등의 질문이 부차적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3)

진각 국사 혜심(眞覺 國師 慧諶, 1178∼1210)은 지눌의 법을 이은 수선사 제2세이다. 그렇지만 혜심과 지눌과의 관계는 시간적인 면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그렇게 돈독하지는 않다. 혜심은 1203년에 출가했다. 출가 후 그는 오산(蜈山)과 지리산 등 깊은 산속에서 실참(實參)을 통해 독자적인 선오(禪悟)의 경지를 요달(了達)한 다음 자증(自證)을 마친 후 1205년 억보산(億寶山) 백운암(白雲庵)에서 지눌을 찾아뵙고 게송을 지어 바친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소나무 안개 속 울려 퍼지고 呼兒響落松蘿霧
차 달이는 내음 돌길을 스쳐 풍겨온다. 煮茗香傳石徑風
이제 막 백운산 아래 접어든 순간 才入白雲山下路
이미 암자에 들어 스승 뵌 듯 하여라.4) 已參庵內老師翁5)

이 시를 본 지눌이 갖고 있던 부채를 건네주자, 또 노래를 지어 바치기를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昔在師翁手裏
이제는 내 손에 돌아 왔어라 今來弟子掌中
만약에 심한 번뇌 괴롭히거든 若遇熱忙狂走
맑은 바람 일으킴 막지 않으리.6) 不妨打起淸風7)

라 하였다. 이때 스승과 제자 간에 서로 하하하고 크게 웃으면서 서로 부채를 주고받았고 옆에 서있던 다른 이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것이 혜심의 입을 빌어서 《진각국사어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단순한 부채의 전달이라기보다는 스승과 제자가 한눈에 상대방의 그릇을 알아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8)

게송을 통해 도력의 크기를 감지한 지눌은 이후 두 차례의 선문답을 더 한 이후에 혜심의 대오를 인가한다. 혜심은 31세 되던 해인 1208년 지눌이 법을 계승하고자 했지만 굳이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깊이 은거해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종문의 명예를 초연히 버리고 심요(心要)를 닦는 수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은둔한지 2년 후인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주위의 권유와 왕의 칙명으로 부득이 수선사 제2세가 되어 지눌의 법석을 이어 개당(開堂)하고 교화(敎化)를 편다. 출가한지 8년 만이었다.9)

위에서 보듯이 지눌과 혜심의 유대는 수년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혜심이 가지고 있는 선사로서의 능력은 대부분 지눌로부터 사사되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지눌을 만나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단지 지눌은 법력(法力)을 높이 샀을 뿐이다.10) 따라서 혜심의 지눌에 대한 관계를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사제지간처럼 스승의 법을 배우고 그 법을 이어가는 경우라고 말하기는 쉽지가 않는 것이다.11)

이 문제와 연관해서도 역시 두 가지의 시각이 발생할 수 있다.

하나는, 혜심이 지눌 간화선법의 요체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혜심 간화선법을 통한 역추론을 통하여, 지눌이 간화선을 접한 이후에 전반기의 주요 사상을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 간화선은 지눌이 그 실질적인 개창자가 된다.

다른 하나는, 혜심이 지눌의 간화선을 수용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혜심 스스로 독자적이고도 본격적으로 간화선풍을 최초로 고양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눌은 단지 간화선을 소개하였을 뿐이고, 한국 간화선의 실질적인 개조는 혜심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간화선 도입 전후에 걸쳐서 지눌 선사상 전체의 본질적인 내용에 변함이 없다는 주장도 상대적으로도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적’이라는 것과 ‘간화선’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 될 수도 있다. 과연 한국적 토양에서의 간화선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그것이다. 지눌이 간화선을 우리나라 불교에 접목시킨 이래 간화선은 어떤 의미에서든 현재 한국의 선을 대표하며, 지눌은 한국 선불교의 종조(宗祖) 내지는 중흥조(中興祖)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과 지눌, 그리고 혜심 사이의 관계는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주) -----
1) 지눌의 사상 형성에는 3번의 주요한 전기가 있다. 그 중 마지막 전기는 41세(1198) 되던 해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읽고 일어난다.
2) 유작인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은 제자 혜심에 의해 1215년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함께 발행된다.
3) 졸고(拙稿), <간화선의 ‘구자무불성’에 대한 일고찰>, 《한국선학》 1호(서울: 한국선학회, 2000), pp.189∼190.
4) 인권한, 《고려시대 불교시의 연구》(서울: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3), p.93.
5)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6책(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94), p.18상.
6) 인권한, 《고려시대 불교시의 연구》, p.94.
7) 《진각국사어록》 <어록>, p.18상.
8) 위의 책, p.18상. 또 이규보가 찬한 <비명(碑銘)>에 의하면 지눌은 혜심에게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마땅히 불법을 펴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본래의 소원을 바꾸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법맥 계승의 한 증거가 될 것이다.
9) 이상미, 《무의자의 선시 연구》(서울: 박이정, 2005), pp.19∼24.
10) 진성규, <고려후기 진각국사 혜심 연구>(서울: 중앙대학교 박사논문, 1986), pp.5∼38. 저자는 지눌과 혜심의 관계에 있어서의 서로 법을 주고받은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지눌과 혜심의 관계에 있어서 혜심보다 지눌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또 지눌의 입적 이후 혜심이 수선사 2세로 추대되는데 있어서 혜심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눌의 문인들과 그 당시의 권력자들이 모두 나서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 혜심의 도력(道力)이 상당히 높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11) 졸고, <혜심의 선사상에 대한 연구>, 《철학연구》 20집(서울: 고려대 철학연구소, 1997), p.117.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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