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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초기불교 중도의 근본 의미
중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길
2017년 08월 01일 (화) 22:06:10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붓다는 성도 이전 오랫동안 고행 등 여러 수행을 해 보았으나 열반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 : majjhima paṭipadā)의 수행법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는 다섯 비구를 찾아 처음 설하는 가르침에서 고행(苦行)과 낙행(樂行)의 두 극단을 떠난 길로 중도를 제시한다. 그리고 중도야말로 진리의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고, 적정(寂靜)과 신통지(神通智)와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라 한다. 다시 중도를 설하는 맥락에서 “행복을 판별할 줄 알아야 하고, 행복을 판별하고 나서는 안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하여 중도의 의미와 목표가 무엇에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중도는 바로 팔정도(八正道)임을 천명한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중도는 어디에서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나타내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로 설명된다. 붓다가 팔정도를 중도라고 했을 때, 팔정도는 여덟 가지 올바른 실천도를 의미하며, 원어 상으로 보면 이러한 바른 길이야말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길이라는 의미를 또한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정(正)은 팔정도이고 정이 아닌 것은 고행과 낙행의 두 극단이라는 것이다. 두 극단은 올바름〔正〕에 반하는 그릇됨〔邪〕으로 버려야 할 것으로 선언한다. 다시 말해 중도는 두 극단을 떠난 제3의 길로서 두 극단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도는 대립적인 두 극단을 파기(破棄)하고 지양(止揚)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중도란 상대적이고 배대적(背對的)인 입장을 파사(破邪)하는 길에 그 핵심이 놓여 있다. 때문에 중도는 배대적인 극단을 파기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도는 수행 상의 고행과 낙행의 두 극단을 파사하는 고락중도(苦樂中道)이다.

이와 함께 중도는 견해의 문제와 관련한 대립적이고 배대적인 입장들을 파기하고 지양하는 가르침으로도 설해진다. 즉 자타(自他), 단상(斷常), 유무(有無), 일이(一異), 일다(一多) 등 이원적이고 이분법적인 입장을 파기하는 중도가 그것이다. 이는 견해 또는 관점과 같은 세계관이나 인간관 또는 가치관에 관한 문제이다.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무중도(有無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자타중도(自他中道), 일이중도(一異中道) 등으로 중도라는 말을 복합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한역 아함에서의 용례이다. 빠알리 원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니까야와 율장에서는 고락중도만 중도(majjhima paṭipadā)라는 말이 사용될 뿐이지 유무중도나 단상중도 등에서는 중도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가운데〔中: majjhena〕에 의해서 법(法)을 설명한다”라는 정도로 나타난다. 즉 실천 수행을 의미하는 paṭipadā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역 아함에서는 중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반면 빠알리(Pali)에서는 고락중도 이외에는 도(道 : paṭipadā)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그럼에도 모두 중도라는 이름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자타, 단상, 유무, 일이, 일다 등이 모두 팔정도에 속한 정견(正見)의 내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빠알리 경전에 근거해 불교를 설명하는 유럽이나 남아시아 불교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에도 이러한 단상이나 유무 등을 한역과 같이 중도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전통적으로 대승의 중관이나 유식의 원전 또한 아함의 전통에 부합되게 유무와 단상 등에 도(praṭipad)라는 말을 더해 중도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초기경전은 중도를 팔정도의 정념(正念)이나 정정진(正精進) 등으로도 제시하기도 한다. 중도의 내용으로 각기 정념의 사념처와 정정진의 사정단(四正斷) 등이 설명된다. 더 나아가 팔정도와 함께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가 모두 중도로 설명된다. 그렇게 되면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모두가 중도인 것이다. 이는 삼학(三學)의 확장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다시 삼십칠조도품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결국 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중도라 할 수 있다. 거꾸로 삼십칠조도품은 팔정도로 압축되고 팔정도는 삼학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일으킬 수 있다. 중도의 내용으로 팔정도를 설하면서 동시에, 왜 견해나 세계관적 입장의 정견이나 정념 그리고 정사유 등으로 각각 중도의 내용을 한정적으로 제시할까 이다.

이는 팔정도의 어원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팔정도의 원어는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로서 정확히는 ‘여덟 덕목은 한 가지의 여덟 마디’ 또는 ‘한 나무의 여덟 가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한역된다. 즉 각각의 여덟 덕목은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수행해야 할 법이 아니라 동시에 포섭해서 닦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 덕목을 닦더라도 다른 7개 덕목과 관련 속에서, 또는 포섭시키면서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중도는 계학(戒學)이라는 도덕적 완성과 정학(定學)이라는 감정과 의지의 정화, 혜학(慧學)이라는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가치관의 확립 모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가운데 자타, 단상, 유무, 일이, 일다 등의 중도는 견해와 관점의 문제로서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삼학의 혜학(慧學)에 해당된다. 후에 전개된 중관(中觀)의 여덟 가지 중도〔八不中道〕 또한 혜학의 범위로 출발한다. 대승경전인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대품반야경》에서도 이러한 팔불중도는 육바라밀 가운데 반야바라밀의 범위로 나타난다. 이는 정견이 혜학 속에 포함되는 초기불교와도 상통한다. 하지만 차이라면 초기불교는 중도가 삼학 가운데 혜학만이 아니라 정학(定學)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반면에 대승불교에서는 주로 견해와 관점의 문제로서 정견에만 한정되고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중도 이해가 결국에는 수행도에서 궁극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교리적 변화를 갖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철 스님이 모든 불교를 회통하는 가르침으로 중도를 강조한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성철 스님은 중도를 구극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적인 수행도라기 보다는 구경론적 의미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성철 스님은 전통적인 불교 이해와 달리 중도를 사성제의 도성제가 아닌 멸성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경우에 따라서 상당한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일견 전통적인 불교 기본교리와 상충하고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리 이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절충적인 입장을 굳이 제시해 본다면 궁극 목적지와 그러한 궁극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단절되어 있지 않고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불교의 구경인 목적지에 도달한 멸성제라도 여기까지 도달하게끔 한 도성제와 단절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는 길〔修〕과 목적지〔證〕는 연결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증(修證)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성철 스님의 중도 이해처럼 팔정도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같은 중도의 팔정도 이해는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생활방식이나 깨달음을 얻은 후의 생활 방식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초기불교는 열반과 해탈을 얻은 후의 십정도(十正道)가 있다. 십정도는 팔정도를 포함하고 있지 배제한 것이 아니다.

열반과 해탈을 얻은 후의 십정도는 팔정도에 정지(正智 :sammāñāṇa)와 정해탈(正解脫: sammāvimutti)이 더해진 것이다. 때문에 초기경전에서 팔정도는 아직 해탈하지 못한 학인(學人)의 길(aṭṭhaṅgasamannāgato sekho)이고 십정도는 궁극적인 열반을 이룬 무학(無學)의 아라한 경지(dasaṅgasamannāgato arahā)로 규정된 이유이다.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에서 팔정도는 아직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설했던 것이 분명하다. 구경론보다는 방법론이다. 더 분명한 점은 초기경전에서 중도는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다시 도성제의 내용임이 확실하다. 때문에 중도나 팔정도의 원어 모두 실천 수행을 의미하는 paṭipadā라는 말이 사용된 것이다.

이 같은 예는 경전에서 궁극의 완전한 열반(parinibbana)으로 가는 일곱 가지 청정(vissudhi)의 단계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道)로 번역된 paṭipadā는 여섯 번째 단계(paṭipadā-ñāṇadassana)에 해당된 수행을 말한다. 더 나아가 여기서 여섯 번째 수행 단계의 내용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Vipassana)이다. 이 단계는 이전의 사마타에 바탕한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는 중도가 팔정도일 때 중도의 수행법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와 가장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팔정도의 정념과 정정 그리고 정견 등에 해당한다.

과연 석가모니 부처님의 중도 가르침이 대승과 동아시아 성철 스님에 이르도록 연속적인 측면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불연속적인 측면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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