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원조(元朝)의 공차(貢茶)

원나라 때의 공차(貢茶) 기록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역대 다른 왕조에 비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문화적 발전보다는 군사적 측면만 강조되었던 시기인 만큼, 국가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시기였다. 더구나 차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타 왕조에 비해 정체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원나라가 중원을 침략하고 통치하였던 시기는 98년(1271∼1368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역대 다른 통일 왕조들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짧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원대(元代)의 ‘차 생산’은 기본적으로 송대와 비슷하였으며, 공차(貢茶)는 여전히 송대의 ‘증청단병차(蒸靑團餠茶)’ 위주의 생산에 그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단, ‘궁정공차(宮廷貢茶)’의 주생산지가 복건성의 건안(建安)에서 무이산(武夷山)1) 지역으로 옮겨졌다는 것 외엔, 더 이상의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대덕(大德) 3년(1299년)에는 차밭이 통틀어 겨우 120여 곳에 불과 했다. 그나마 대덕 6년(1302년)에 이르러 관부(官府)에서 무이산 사곡계(四曲溪)2)에 어다원(御茶園)3)을 건립하고, 수천에 달하는 배공(焙工)4)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공차(貢茶)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동천공(董天工)의《무이산지(武夷山志)》에 의하면, 지원(至元) 16년(1278년)에 절강행성(浙江行省)5)의 평장(平章)6)인 고흥(高興)이 유람차 우연히 무이산을 지나다가 ‘석유(石乳)’ 몇 근을 만들어 조정에 바쳤더니,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원(至元) 19년(1281년)에 조정에서 그 곳 현령에게 명하여 매년 공차(貢茶) 20근을 바치게 하였으며, 이 때 찻잎을 따는데 동원된 가호(家戶)가 무려 80호(戶)였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조정의 요구가 갈수록 많아져서 찻잎을 따는데 동원된 가호가 무려 250호까지 증가하였으며, 찻잎 360근으로 용봉단차 5,000병(餠)을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원나라 말기인 지정(至正) 말년(1367년)에는 공차 액수가 무려 990근으로 증가했으며, 이러한 공차의 액수는 명나라 초기까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5. 명조(明朝)의 공차(貢茶)

명나라에 이르러 중국의 차 역사에 있어 일대 변혁기를 맞이하게 된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재위 1368∼1398년)이 원(元)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이후, 이전까지의 병차(餠茶) 제조와 말차법(抹茶法)이 국법으로 일체 금지 되고, 산차(散茶)7)가 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다기(茶器)도 다완(茶碗)이 아닌 자사호(紫沙壺)가 출현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명나라의 초청(炒靑) 아차(芽茶)8)의 출현에 따라 명나라 초기에 이르자 이제까지 공정과정이 복잡하던 단차(團茶 : 병차) 대신 그 제조법이 한층 더 간단해진 아차(芽茶)를 만들어 바치도록 차법(茶法)이 개정된다. 이는 서민 출신이었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귀족들의 차 사치에서 오는 폐단을 없애버림으로써, 농번기 때 농민들의 이중적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런데 실지로 아차(芽茶)가 단차(團茶)보다 그 품질이 뛰어나 황실에서는 아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아마도 찻잎의 신선도 면에서 그 품질을 인정받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게 된 아차(芽茶)도 역시 그 품질이 점점 정교화 되고, 세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그 등급을 나누게 되었는데, 《명대정교(明代政敎)》에 의하면, “홍무(洪武) 24년(1391년) 9월, 건녕(建寧)
에 명을 내려 매년 차를 조공하되, 용봉단차를 만들지 말라 하였다. 천하의 차(茶) 중에서 건녕의 차가 최고이며, 그 품질의 ‘탐춘(探春)’, ‘선춘(先春)’, ‘차춘(次春)’, ‘자쟁(紫箏)’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차를 따는데 필요한 차호(茶戶)를 500호(戶)나 설치하였으며, 대신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라고 하였다.

《오흥장고록(吳興掌故錄)》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저차(顧渚茶)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 매년 조정에 바치는 공차(貢茶)를 단지 32근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이나마 태조 주원장의 근검절약 정신과 애민사상을 잘 엿볼 수 있겠다.

그러나 주원장의 이러한 애민사상과 달리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명나라의 공차 생산지역은 날로 확장되어갔고, 공차의 양도 또한 날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명 태조 때에 1,600여 근이던 건녕(建寧)의 공차(貢茶) 양이 주재후(朱載垕) 융경(隆慶 : 1567∼1572년)에 이르러 2,300근으로 증가하였다. 주첨기(朱瞻基) 선덕(宣德 : 1426∼1435년) 때에는 의흥(宜興)에서 바치던 공차가 100근에서 무려 2,900근까지 증가하였다. 또한 기록하기를 안휘성의 육안아차(六安芽茶)9)의 품질이 매우 좋아서 공차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명초 차의 사치를 막고 검소한 차 생활로 농민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차법을 개정했던 태조 주원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명나라의 차는 그 형태만 단차에서 산차로 바뀌었을 뿐, 또 다른 방식의 차 맛과 사치를 쫒아 송대의 호사스러운 망국의 차 문화를 답습해 가지는 않았을까? 약간의 안타까움이 남는다.

명나라 효종 홍치 연간(1488∼1505년)에 진사(進士) 조호(曹琥)는《청혁아차소(請革芽茶疏)》란 상소를 써서 황제에게 올려 당시 공차(貢茶)로 인한 가혹한 정치의 위해(危害)를 폭로하였다. “한 사람을 봉양함으로써 천하의 백성을 곤고하게 하거나, 남을 봉양하는 물건 때문에 남에게 우환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 바치는 공차 외에도 지방 제후나 환관들에게까지 차로 바치는 세금이 있었으니, ‘아차지정(芽茶之征)’, ‘세차지정(細茶之征)’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고 폭로하고 있다.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모든 차 생산지는 반드시 매년 정액을 조공하여야 하며, 차를 생산하는 곳은 반드시 공차를 바쳐야 하며, 감면이 있을 수 없다. 명나라 조정의 공역이 무겁기 그지없고, 공차의 위해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으니 백성들은 생활을 꾸려가기가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만력(萬曆) 연간(1573∼1620년) 검사 한방기(韓邦奇)가 쓴《차가(茶歌)》에는 관청에서 백성들을 잔혹하게 협박하고 공차(貢茶)를 강탈하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폭로하였다.

“부양10)강(富陽江)의 물고기, 부양산(富陽山)의 차, 물고기가 살찌면 내 아들을 팔아야 하고, 차가 향기로우면 내 집이 파산 나네. 차를 따는 아낙네, 고기 잡는 어부, 관청에서 모두 강탈해가니 성한 몸이 없네. 이 넓은 하늘은 어찌 이리도 불인(不仁)한고? 이 땅도 어찌 이리 무심한고? 물고기는 다른 현(縣)에서는 살 수 없나? 차는 어찌 다른 도시에는 나지 않나? 부양산은 어느 날에 무너질꼬? 부양강은 어느 날에 마를꼬? 산이 무너지면 차나무 또한 죽을 게고, 강이 마르면 물고기도 없을 진데, 오호(嗚呼)! 산은 무너지기 어렵고, 강은 마르기 어려우니, 우리 백성들은 (정말) 살 수가 없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명나라 고관대작들과 환관들의 공차(貢茶)에 대한 횡포로 인해 하층부의 수많은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핍박 받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호에 송조(宋朝)의 공차(貢茶)를 서술하면서 필자는 ‘차의 사치’에 대해 심각하게 위험성과 경계심을 거론한 적이 있다. 명대 초기에 주원장 또한 자신의 검소함과 애민(愛民)의 결의를 갖고 단차를 폐지하였다. 이는 바로 송 왕조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던 ‘차의 사치’를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태조 주원장의 차법 정신을 망각한 채, 또 다시 송대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이는 결국 환관정치로 서서히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데 일조를 가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명대의 공차(貢茶) 역사를 보며, 필자는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治天下者以史爲鑑〕”는 옛 선현들의 말씀을 떠올린다. 비록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자가 아닐지라도 역사는 분명히 올바르고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초석이요, 반성의 거울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주) -----
1) 무이산(武夷山) : 복건성 무이산시(武夷山市)에 위치한 무이산 풍경구. 구곡계(九曲溪)와 오룡차의 원조 격인 대홍포(大紅袍)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2) 복건성 무이산 구곡계(九曲溪)의 4번째 계곡이다. 주요 경관으로는 대장봉(大藏峰), 선조대(仙釣臺), 어다원(御茶園), 소구곡(小九曲) 등이 있다.
3) 어다원(御茶園) : 속칭 ‘배국(焙局)’이라고도 한다.
4) 배공(焙工) : 차를 홍배(烘焙)하는 기술자들. 지금의 차공(茶工 : 제다기술자)에 해당함.
5) 절강행성(浙江行省) : 행성(行省)은 원나라 때 지방통치기관을 이르는 말로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인 성(省)의 기원이다. 고로 절강행성은 지금의 절강성을 이르는 말이다.
6) 평장(平章) : 고대 관명(官名)이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평장정사를 두어 정사를 맡도록 하였다. 현재의 성장(省長)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7) 산차(散茶) : 떡처럼 쪄서 뭉쳐서 만든 단차〔團茶 : 또는 병차(餠茶)〕와 상반된 명칭으로 찻잎을 그대로 초청하거나 증청하여 잎 하나하나를 그대로 건조 시켜 만든 차를 말한다. 즉, 지금의 엽차(葉茶)를 뜻한다.
8) 아차(芽茶) : 차 싹과 찻잎을 이른다. 다인들 사이에서 자주 말하는 ‘일창일기(一槍一旗)’, ‘일창이기(一槍二旗)’, ‘일창삼기(一槍三旗)’니 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중국에서는 현재 이런 말은 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일아일엽(一芽一葉)’, ‘일아이엽(一芽二葉)’, ‘일아삼엽(一芽三葉)’이란 용어를 상용하고 있다.
9) 건녕(建寧) : 현 복건성(福建省) 삼명시(三明市) 직할의 현(縣)이다.
10) 육안(六安) : 현 중국 안휘성의 직할인 지급시(地級市)이다. 현재 그 유명한 육안과편(六安瓜片) 차의 생산지이기도하다.
11) 부양강(富陽江)과 부양산(富陽山) : 여기서 부양(富陽)은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의 직할시이다. 항주 서남부에 위치하며, 서호(西湖)와 소산(蕭山), 그리고 여항(餘杭)과 접경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고관대작들의 공물 강탈과 횡포에 대해 당시 차의 생산지역인 부양현의 강과 산을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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