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을 걸어 다닌 그 길은 때로 2, 3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특히 지금처럼 큰비가 오거나 큰 눈이 내릴 때면, 길이 끊어져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핑계가 되어주곤 했다. 그런 망연한 기억의 한 자락에 연방죽과 연꽃의 화사한 반겨줌이 있다.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 입구에 있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방죽에는 이맘때면 소나기도 충분히 막아주는 커다란 연잎과 어쩐지 이 세상에 핀 꽃이 아닌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던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곤 했다. 조금 지나고 나면 연한 연밥이 열리고, 그 맛 또한 일품이어서 우리는 주인이시던 선생님의 훈화 속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방죽에 들어가 몇 개의 연밥을 따서는 줄달음치던 우리는, 산 속 깊은 곳에 이르러서야 입 안 가득 퍼지는 연향과 달콤하게 씹히는 열매의 아삭함을 공유할 수 있었다.

요즈음 그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조계사에 갈 일이 많아졌다. 조계종단 적폐청산을 위한 연대회의 구성원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허정 스님과 대안 스님, 문영숙 보살 같은 분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이다. 그 분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조계사 일주문 앞에 서서 제발 조계종단이 불자임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만은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고 외치고 계신다.

그 분들의 1인 시위에 자발적인 동참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명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피켓시위의 형태로 바뀌며 몇 가지 변화가 함께 찾아왔다. 그 중 하나는 총무원측의 감시가 강화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제부턴가 플라스틱 항아리에 담긴 연꽃들이 시위하는 공간까지 일부 차지한 것이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꽃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며 향기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자리한 총무원측 입장을 알리는 플래카드까지 자신의 풍경 일부로 포함하면서, 홀로 또 함께 장엄한 한국화를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어떤 청년 둘이 다가와 꼭 이렇게 불교계의 부끄러운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하겠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주변 사람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한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이기도 하다고 해서 가까이 불러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몸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암덩어리가 자리하고 있고, 수술만 잘 받으면 충분히 회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당연히 수술을 받겠다는 답을 건네 왔고, 우리는 바로 그 암덩어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그들은 떠나갔는데, 오후에 와서 시비조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는 전언을 들어보면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동원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 대화의 과정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겉으로 핀 연꽃의 화려함만을 외국 관광객을 비롯한 시선에 노출시키고 싶어 하는지 모르고, 우리는 그 밑에 있는 진흙탕의 적나라한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어야만 연꽃을 온전히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모른다.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연꽃은 온갖 난관과 고통 속에서도 연꽃 그 자체로 핀다. 그리고 그 연꽃은 곧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이자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조계종 총무원 구성원들 중 상당수는 한때 한국불교계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던 분들이다. 지금도 그 마음의 뿌리는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일상에 함몰되어 습관적인 냉소와 적대적인 시선의 형태로 마음속에서 질척거리고 있을 그분들의 진흙과 나 자신의 분노 섞인 진흙이 엉키고 어우러져 작은 연방죽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연꽃의 화사함과 향기로움이 가득 퍼지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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