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가 알천 이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
선덕영왕 재위시 돌 다듬어 첨성대 쌓아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000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이고, 이후 (백제) 병사 1,200인이 오자 역시 쳐서 모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알천과 필탄이 여근곡에서 백제군 500명을 섬멸했는데 백제 장군 하나가 도망쳤나 보다. 후발대가 오는 것을 기다려 반전을 기대한 것일까? 여하튼 여근곡 전투에서 충분히 대비하지 않은 우둔한 장군 우소로 인해서 백제군은 후발대까지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죽었다. 전장에서 장군의 역할은 이처럼 중요한 것일까?

선발대 기병 500명을 먼저 섬멸하고 후발대 보병 1,200명을 차례대로 공격한 것으로 보이는데, 말을 탔다고 해서 너무 빨리 간 것이 작전상의 큰 잘못이 아닐까? 보급대이자 어쩌면 기병의 보디가드 격인 보병을 무시한 결과는 정말 무서웠다. 말이 여근곡에 주둔한 것이지 식량도 모자라 한겨울에 춥고 배고파서 동상에 걸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을 피워 말을 잡아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결국 결과는 전멸이었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투 가운데 신라가 압승한, 어쩌면 첫 번째 대전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모두 감복하였다.

두꺼비도 아니고 개구리가 등장한다. 백제군을 우습게 여긴 단어 사용일 것이다. 여하튼 백제군 병사의 모습이 개구리가 노한 모습이라고 비하한 것이다. 이런 개구리가 화내봤자 개구리다. 겨울에 계곡물 곁에서 동면하여 힘 못 쓰는 개구리 꼴이라고 놀린 것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듯싶다.

여성의 성기를 논하는 것이 좀 민망한데, 굳이 백색의 빛이라고 한 것이 참으로 인위적이다. 선덕여왕은 알천이 적어준 대본을 잘못 읽은 듯하다. 그래서 알천이 체면상의 이유로 알천갈문왕이 아니라 음갈문왕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수많은 남자 신하들 앞에서 ‘성희롱’을 자행한 선덕여왕 앞에서 성골, 진골의 신하들은 그녀의 성(聖)스러움에 감복하는 쇼맨십을 보여줬다. 물론 끝나고 나서 술을 마시며 자근자근 씹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다. 참으로 성(性)스러운 여왕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 월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여라.” 하였다. 군신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어느 곳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다.” 하였다. 모 월일에 이르러 과연 왕이 승하하시므로 신하들이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창건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죽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선덕여왕은 말년에 매우 아프고 염세적이었던 것 같다. 무당이나 박수 등에게 자신이 언제 죽을지 궁금해서 자주 물었을 것이다. 대충 언제 죽을지 알게 된, 아니 믿게 된 여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내가 그때 죽을 테니, 그때까지는 잘해야 돼!”라고 했을 것이다. 계속 불공을 드리며 극락왕생하듯이 ‘사천왕천’ 위의 ‘도리천’에 태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운 예지력을 한 번 더 발휘하기 위해 작품을 공모했다.

거기에 응모한 것이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이었다. 선덕여왕 사후의 신성화 정책을 입안한 김춘추가 거대한 힘을 가졌던 알천공에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까? 여하튼 원래 김춘추가 해야 할 일을 그의 아들은 문무왕이 해준다. 어차피 여기저기에 절을 짓던 시기에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 하나 짓는 게 뭐가 어려웠을까?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여하튼 도리천에서 극락왕생한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첨성대도 이 왕이 아닌, 이 왕대에 만든 것도 아니고 쌓았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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