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애인이었을 수도…왕위 계승 후보 올라
진평왕 사후에 섭정왕 추대, 고사 후 김춘추 추천
 

한겨울에 개구리가 울었다는 옥문지는 아무리 알아봐도 온천이 아니며, 당시에 이상기후도 없었을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선덕여왕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커진다. 온실을 만들고 애완용 개구리를 데려다가 소리를 내게 했을 가능성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당시 국정원이나 보안사와 같은 정보 취급 당국이나 부처에서 파발을 통해서든 인편을 통해서든 참새까지는 아니어도 비둘기 등을 이용해서든 백제군의 이동을 알렸을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선덕여왕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나보다. 그들이 도착하는 경로와 시간은 기병이냐 보병이냐에 따라 계산이 뻔하다. 당시에도 국방전략이 있었을 것이며 전력이나 전략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백제에서 국경선을 몰래 넘어서 신라 왕경인 경주까지 곧장 이동한 후 바로 기동타격하려면 경주 인근 여근곡 부근에서 일단 숨을 돌리고 나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측의 이런 전략적인 검토가 끝났을 때 선덕여왕은 개구리 울음 같은 백제군을 물리칠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그리고 그 성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도 세웠다. 백제왕에게 미리 돈을 주고 마음에 안 드는 신하들을 모두 모아서 몇 월 몇 일에 보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선덕여왕의 위업만 남아 우리들에게 회자되고 있을 따름이다. 승자의 역사란 이런 뜻인가?

여하튼 국경이 뚫렸다는 것이 너무 일찍 알려지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걱정한 선덕여왕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활용하는데 성공했다. 정말 놀라운 혜안과 기지가 아닐 수 없다. 꼼수의 제왕인 아버지 진평왕은 이미 붕어했으니 그의 생각도 이젠 아닐 것이다. 모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고 판단해보면 선덕여왕의 생각이 그만큼 깊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총괄기획은 누구였을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632년(선덕여왕 즉위년) 2월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정월에는 이찬(伊湌)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이듬해인 637년(선덕여왕 6) 정월에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당시 적지 않은 관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에 관여한 ‘공신’들이다. 그런 공신들이 어린 선덕여왕의 놀이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많지 않을 듯하다. 아버지 진평왕 때 하던 짓을 늘 보았던 그들 대신에 선덕여왕은 알천과 필탄을 고른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알천의 작품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등의 사료를 보면, 635년(선덕여왕 4)에 이찬(伊飡) 알천공은 독산성(獨山城)에 침입한 백제장군 우소(于召)의 군을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647년에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고 647년(진덕여왕 1)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毗曇)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다. 이번 일로 가장 승승장구하며 권력을 쥐어가는 모습은 여근곡 사건의 배후이자 공신이자 꾀를 낸 계사가 누군지 명백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또 다른 기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述宗)·임종(林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었다고 나온다. 진덕여왕이 재위한 지 7년 만에 죽음으로써 성골(聖骨)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자 화백회의는 의장인 알천공을 섭정왕, 곧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알천공은 자신보다 김춘추(金春秋)가 덕망이 높고 세상을 다스릴 만한 영걸이라며 왕위 계승자로 추천한 다음 물러났다고 전한다.

물론 김춘추를 위해서 조작된 사료일테지만, 당시 알천공의 권력은 정말 대단했나보다. 여근곡 사건 이후로 왕위 계승 후보에 까지 오른 알천공. 결국 대권은 잡지 못했지만 그의 정계의 본격적인 데뷔가 바로 ‘여근곡’이었다.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여근곡’ 사건에 등장하는 ‘알천’이 혹시 선덕여왕의 애인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는 남편이 음이며, 그가 갈문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여왕의 남편이 갈문왕이 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갈문왕 자격을 가진 음이라는 인물이 여왕의 남편이 되었다고 보면 이해가 더 쉬울지 모르겠다. 신라 중고기 갈문왕이 왕위 계승에 적극 간여하고 지증왕처럼 왕이 된 것은 사료에서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상상의 나래를 탄 역사적인 추측은 매우 위험하지만 무척이나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섬멸한 알천처럼 말이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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