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하여 더 이상 퇴보하지 않는 단계를 불퇴전이라 한다. 수행자가 불퇴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자신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불퇴전에 든다는 것은 성불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경지이기도 하다.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계에서 대체로 세 가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계위에서 퇴전하지 않고, 둘째는 수행에서 퇴전하지 않으며, 셋째는 생각[念]에서 퇴전하지 않음을 불퇴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퇴전도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성문 연각의 이승들은 삼악도에 태어나는 일이 없음이 계위의 불퇴전이라 하고, 변지(邊地:예를 들면 불교를 모르는 곳)에 태어나지 않고 육근(六根)을 제대로 다 갖추며 여인의 몸을 받지 않음을 수행의 불퇴전이라 하며, 항상 숙세의 일을 알고 있음을 생각의 불퇴전이라 한다.

한편 대승의 보살들에게는 칠지(七地) 이상을 계위의 불퇴전이라 하고, 보살만행을 닦음을 수행의 불퇴전위라 하는데 보통 8지(地) 보살부터라고 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관법이 무르익는 8지에서는 법의 흐름에 들어가므로 생각의 불퇴전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원융한 경지의 보살에게는 초주(初住)에서도 여래의 하나의 불신(佛身)이 일체의 무량한 불신과 서로 상즉(相卽)해 있음을 아는데 여기서 계위, 수행, 생각의 불퇴전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삼십이상을 얻는 업의 인연을 닦아 익히는 자는 불퇴전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다. 곧 삼십이상의 수행을 통한 불퇴전 얻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상호는 삼십이상 팔십종호라고 하는데, 이런 상호는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야 얻을 수 있다. 부처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이런 상호의 모습이어야 중생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켜서 이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십이상 팔십종호의 거룩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통 백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고 다른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다. 삼십이상은 지혜와 복덕이 지극히 원만해서 이루어지는 모습이므로, 상호를 갖춘다는 것은 이 때부터 부처의 길에 들어가는 불퇴전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삼십이상을 얻는 수행이 곧 불퇴전하는 수행이라 하고,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성문 연각보다 훌륭한 보살행을 닦으므로 아비발취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마하살들이 계행을 수지하여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며(신업), 보시하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고 실천하며(의업), 진실한 말에 머물기를 수미산과 같이 하면(구업),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삼십이상 중에 발바닥이 평평하기가 상자와 같은 모습을 얻는다.

만일 보살이 부모나 화상에게나 어른부터 축생에 이르기까지 법다운 재물로 공양하거나 공급하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 무늬가 있는 천폭륜상(千輻輪相)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부모와 스승에게 항상 기쁜 마음으로 대하면 세 가지 잘 생긴 몸을 얻으니, 손가락이 가늘고 길며, 발꿈치가 원만하고 둥글며, 몸이 방정하고 곧다. 이상 세 가지 모습은 같은 업의 인연이다.

만일 보살이 사섭법(四攝法)으로 중생을 인도한다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비단결 같은 맑은 막이 있게 된다.

만일 보살이 계율을 수지하고 법을 듣고 보시하기를 만족함이 없이 많이 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관절이나 복사뼈가 통통하고 원만하며 몸의 털이 위로 쏠려 있게 된다.

만일 보살이 전심으로 법을 듣고 바른 교법을 연설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장딴지가 사슴의 다리 같이 길게 된다.

만일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음식을 탐내지 않고 만족함을 알고 보시하기를 항상 좋아하고 병든 이를 보살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원만하기가 니구타나무 같고, 손이 무릎을 지나고,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서 정상을 볼 수 없다.

만일 보살이 두려워 하는 이를 보면 구호하여 주고, 헐벗은 이를 보면 옷을 주면 이런 인연으로 남근이 몸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지혜 있는 이를 친근하고,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며, 묻는 일에 대답하기를 좋아하고,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살결이 보드랍고 몸의 털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모습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항상 의복, 음식, 와구, 의약, 향, 꽃, 등불 등으로 남에게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황금빛 같고 늘 광명이 빛나게 되는 모습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보시하되 보배로운 것들을 아낌없이 버려서 주는데 복밭인가 아닌가를 보지 않고 행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일곱 군데가 원만한 모습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보시할 때 마음에 의심을 내지 않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부드러운 음성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법답게 재물을 구하여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뼈마디가 원만하고 몸매가 사자와 같이 균형 잡혀 있고, 팔과 팔꿈치가 원만하다.

만일 보살이 이간질하는 말과 욕설하는 말 성내는 마음을 멀리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40개의 이가 희고 깨끗하며 가지런하고 조밀함을 얻게 된다.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들에게 대자비를 닦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두 송곳니가 희고 크게 됨을 얻게 된다.

만약 보살이 항상 달라는 중생에게 소원대로 주리라 서원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사자와 같은 뺨을 얻게 된다.

만약 보살이 음식을 구하는 자에게 음식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맛 중에서 좋은 맛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열 가지 선한 일을 행하고 남에게까지 교화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넓고 긴 혀를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들추어 내지 않고 정법을 비방하지 않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범천의 청정한 음성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이 원수나 미운 이를 보고 기쁜 마음을 내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검붉은 속눈썹을 얻게 된다.

보살들이 이와 같이 삼십이상의 업의 인연을 닦으면 보리심이 퇴전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우리 중생들은 삼십이상의 업의 인연을 닦아서 업의 과보를 끊고 불성을 깨달아 부처의 경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경에서는 일체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고, 부처의 경계와 업의 과보와 불성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는 항상한 것이며 항상하므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일체중생들은 번뇌가 덮여 있어서 항상하다고 하는데, 이런 항상하는 중생들의 항상하는 번뇌를 끊으므로 무상하다고 한다. 만일 중생들이 항상하다면 어떻게 8성도(聖道)를 닦아서 모든 고(苦)를 끊겠는가. 중생들은 끝없는 번뇌를 끊어가니 마침내 모든 괴로움이 끊어지면 무상하다고 하며, 받는 안락은 항상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중생들은 번뇌가 덮여서 불성을 보지 못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열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