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결사운동은 조계종에서 뿐만 아니라 천태종에서도 있었다.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1245)가 중심이 된 백련사(白蓮社) 결사(結社)가 그것이었다.

요세는 천태교관을 수학하고 23세 되던 1185년(명종 15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1198년(신종 원년) 봄에, 개경에 있는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高峯寺)의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산을 유력했다. 그러던 중에 지눌의 권유로 팔공산 거조사에서 함께 수선(修禪)하며, 지눌이 결사운동을 송광산으로 옮겨갈 때에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조 지눌의 수행방법과 그 수행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참회(懺悔)와 정토(淨土)에 대한 중시를 통해 불자들의 병을 치유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선사들의 힐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요세는 마침내 영암의 월출산 약사암(藥師庵)에 거주하던 1208년(희종 4년)에 홀연히, “만약에 천태묘해(天台妙解)를 발양(發揚)하지 못하면 영명 연수(永明 延壽)의 120병(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선으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으로의 사상적 전환을 하고 지눌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요세는 지눌 밑에서 수년 동안 선(禪)을 공부했지만, 천태종풍(天台宗風)의 부활을 위한 독특한 결사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약사암에서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80여 칸의 사찰을 세우고 1216년 백련사 결사를 조직하게 된다.

1232년(고종 19년)에 백련사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한 것을 계기로 체제를 재정비하고, 마침내 1236년 제자 천척이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발표함으로써 명실공히 신앙결사 운동의 이론적 측면을 완성하게 되며, 지눌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과 짝을 이루게 된다. <백련결사문>이 발표되자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으며, 이후 백련사는 요세에 이어 8국사(國師)를 배출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다음을 보자.

임진년(1232년) 여름 4월 8일 처음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는데, 모두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를 그대로 따랐다. 오랫동안 법화참(法華懺)을 수행하고 전후에 권하여 발심(發心)시켜 이 경을 외우도록 하여 외운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사중(四衆)의 청을 받아 교화시켜 인연을 지어 준 지 30년에 묘수(妙手)로 제자를 만든 것이 38명이나 되었으며, 절을 지은 곳이 다섯 곳이며, 왕공대인(王公大人) 목백현재(牧伯縣宰)들과 높고 낮은 사중들이 이름을 써서 사(社)에 들어온 자들이 3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서로 가르침을 전하여 한 귀(句) 한 게(偈)를 듣고 멀리 좋은 인연을 맺은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1)

위에서 보이듯이 백련사에서는 대중들이 《법화경(法華經)》을 읽고, 또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을 닦았으며, 극락왕생(極樂往生)을 희구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1만 번씩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아 매일 실천하였다.

이후 백련사에서는 요세 이후 8국사가 배출되어 대를 이어 나갔으며, 특히 제2세인 천인(天因)과 제4세인 천책(天頙)이 백련사 사주(社主)로 있을 때 더욱 교세를 크게 떨쳤다. 그리고 제7세인 무외(無畏)가 개경 묘련사(妙蓮寺)의 주지가 됨에 따라 이 절은 백련사의 별원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요세로 하여금 지눌과는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을까? 주지하다시피 지눌은 ‘돈오(頓悟)’와 ‘정혜(定慧)’를 말한다. 그러나 요세가 보기에 이 사유체계는 너무 어려워서 적어도 지식대중 이상이 되어야 접근이 가능하다. 그 결과, 요세는 ‘참회’와 ‘정토’를 주장한다. 요세가 참회와 정토를 주장하게 되는 이면에는 그의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다시 말해서 요세는, 최소한의 지해(知解)의 힘마저도 없고, 근기(根機)마저 너무 열등하여, 도저히 참선(參禪)을 할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하근기의 범부중생을 제도하고 싶은 것이다. 자력(自力)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길이 없는 가련한 중생들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연민이 바로 백련결사의 숨은 동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세가 백련결사에서 법화교관(法華敎觀)을 바탕으로 하여 참회행(懺悔行)과 미타정토신앙(彌陀淨土信仰)을 실천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다수의 농민․천민층들에게 불교신앙의 활로를 터주고자 하는 보살행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선결사(修禪結社)와 백련결사(白蓮結社)에는 차이가 있다. 수선결사가 조계종(曹溪宗)의 선(禪)을 수행하는 모임인 데 대하여 백련결사는 천태종(天台宗)의 법화행법(法華行法)을 닦는 모임이며, 수선결사가 지해(知解)를 가지고 스스로 발심(發心)할 수 있는 의욕적인 인간을 참여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데 대하여 백련결사는 나약한 범부(凡夫)를 대상으로 하여 죄장참회(罪障懺悔)와 타력염불(他力念佛)로써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지눌과 요세의 결사는 종지(宗旨)나 수행방법(修行方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 당시 불교계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결사의 주도세력이 종래처럼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라 지방의 향리층․독서층 출신이었으며, 그에 따라 불교의 중심지가 중앙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본질적으로 지식층과 더하여 일반 민중을 상대로 한 새로운 불교혁신운동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한 점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밖에 고려시대의 신행결사로는 보암사(寶巖寺)와 연화원(蓮華院)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신행결사라기보다는 신도들의 모임과 같은 것이었다.

보암사에서는 60세가 넘은 40여 명의 퇴관 노인들이 매월 8·14·15·23·29·30일의 6재일(齋日)에 모여서 《법화경》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담론하는 한편, 15일의 재일에는 밤을 새워 가며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한 염불(念佛)을 하였다. 연화원에서도 매월 6재일에 같은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노소의 구별 없이 개경의 남쪽 주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강한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공개적인 불교 신행결사를 조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깊은 산중에서 소수의 승려들이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해탈을 위한 용맹정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신행결사는 대체로 후기에 많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이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였으며, 건봉사와 망월사(望月寺)의 만일회(萬日會)가 유명하였다.

특히, 건봉사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처음은 순조 때인 1801∼1834년까지 용허(聳虛)가 주관하였고, 두 번째는 철종 때인 1850∼1863년까지 벽오(碧梧)가 주관하였으며, 세 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근대 이후에도 양산 통도사 등 큰 사찰에서는 염불결사를 비롯하여 수선결사, 대장경 연구를 위한 부분적인 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한 번 들어가면 6년·10년 등을 기한으로 하여 일체 외부의 출입까지를 금하는 특별 수선결사가 일부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참여 인원은 극소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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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문선》권117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 병서>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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