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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초기불교의 차별금지법 Ⅳ
“인권 감수성 고양하는 반복적 교육 필요”
2017년 07월 02일 (일) 22:13:48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생각해 보니 필자가 차별금지법과 같은 인권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요인이 있다. 9년간의 인도 유학 생활이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머무른 델리는 인간의 가능한 모든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세계이다. 인도 연방의 수도인 델리는 인도인뿐만이 아니라 인도를 찾는 유럽인 등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넘쳐난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유명 유적지나 관광지에서 인도인과 외국인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간의 문제가 밖에서 온 관광객의 눈이 아닌, 안에서 들여다보는 멈춘 자의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인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인도인은 같은 인도인을 계급의식으로 차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별하는 사람이나 차별받는 사람들이 별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외국인인 나에게도 자신들의 그러한 차별문화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는 데에 내심 놀라울 때가 있었다. 인도에서는 같은 인도인은 물론 중심부에서 벗어난 주변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차별한다. 중심부 인도인은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네팔 사람이나 동북부 사람들을 이등국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별한다. 인도에는 네팔로부터 온 가난한 이주노동자가 많다. 인도에서 네팔사람을 의미하는 ‘네팔리’는 일종의 차별적 언사처럼 쓰인다. 마찬가지로 몽골 계통의 동북부 사람들은 ‘찡끼’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차별한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폭은 상당히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들의 생각과 의식구조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아시아인에 대한 유럽 백인들의 우월적인 의식을 대할 때 아시아인으로서 몹시 기분이 나쁘다. 나아가 아시아인들조차 이러한 백인 우월을 숙명적인 것처럼 감수하려 하거나 받아들이려는 모습 또한 여간 기분이 좋지 않다. 심지어 당연시하는 태도를 볼 때 절망감이 들 때도 있다. 인종과 민족의 우열의식에 따른 차별이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었는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인도 등지에서 겪은 필자의 이러한 인종과 민족, 그리고 계급 차별의 경험은 2000년도 초에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유럽 백인들 모습을 닮으려고 온통 노랑머리에 유럽형 두개골이나 체형을 선호하는 모습으로 넘쳐났다. 그런 현상은 지금도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계속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인종적 차별의 문화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한국인에 내면화된 것으로 여겨져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국에는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외모에서부터 우리와 차이가 있는데, 그러한 차이를 이유로 그들을 온갖 언사와 태도로 차별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고 본다.

최근 대학 수업 시간에 이러한 차별의 문제를 설명하자 한 학생이 뉴스에 나온 사건을 알려주었다. 동영상을 보니 한 중년의 한국인이 공공장소에서 말대답하는 동남아인을 기분 나쁘다고 ‘감히’라는 말을 써가며 피투성이 되도록 마구 두들겨 패는 동영상이다. ‘감히’라는 말 속에 차별의식이 너무나 선명하게 배어있어 부끄러웠다. 역지사지로 ‘내가 동남아 갔을 때 그들이 나에게 그러한다면?’을 생각하니 더욱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가끔 동남아와 관련한 언론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일부러 모니터링해 본다. 동남아인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적 언사가 여과 없이 널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우리에게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이 얼마만큼 깊이 배어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많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에서 ‘조센징’이라는 말과 함께 받는 차별에는 분개한다. 미국이나 유럽에 갔을 때, 또는 그곳에 살면서 그들로부터 받는 차별은 감수해야 할 것인 양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기도 하고 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받는 차별에 대해선 분노한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 백인들에 대한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인종과 민족 그리고 국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은 경시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 정부가 차별에 관한 문제를 특별하게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매우 칭찬할 바이다. 이왕이면 초등교육에서부터 인권 감수성을 고양하는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한, 그리고 삶의 가치를 더욱 구현하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불교계에 자리한 차별구조 또는 차별의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여 고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계는 대체로 차별금지법의 입법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작 불교계 내부에 자리한 차별구조는 깊이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불교계는 왜 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차별의 문제를 사라져야 할 것으로 깊이 인식한 결과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필자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개신교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 아는 바처럼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를 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불교인이 모욕감과 상처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의 이러한 태도가 지금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살면서 안하무인격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웃종교를 모욕하는 경우를 한 번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터미널이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와 같은 교육의 장에서조차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이제는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어찌 보면 종교 인권 같은 의식이 성숙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처벌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쯤해서 다시금 한국불교 현실을 따져보게 된다.

한국불교는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에 걸맞지 않게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맥락에서 주도권은 오래전부터 이웃 종교에 내주었다. 더 많은 예를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치계와 교육계 등 모든 측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종교는 불교가 아닌 개신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불교계는 사회를 주도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 등한히 해온 과보를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될 때 불교는 혼란 속에 있었다. 한국 전통종교인 불교의 혼란과 공백에 서구 종교는 교세적인 측면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는 성공한 반면에 불교는 한국에서 오래된 종교답지 않게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다. 한국불교 지도부는 아직도 이 사회를 주도해 갈 공적인 차원의 인재 양성 개념이 희박하다.

필자는 이 점을 개신교는 종교지도자가 재가의 성직자들인 반면에 불교는 출가스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출가스님과 개신교의 재가성직자는 세속사회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나가는 수준과 정도에서 차이가 크다. 때문에 전래된 지 불과 100년 남짓 되는 이웃종교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주도층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교육기관과 사회시설에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한국이라는 세속사회에 깊고 폭넓게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그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기적으로 잘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불교계의 소외감은 갈수록 깊고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제는 출가스님들이 나서서 종교적인 편향과 차별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 입법화를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불교는 이제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보호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결국 법으로나마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 이르러 차별금지법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갈수록 불교인구가 줄어들고 종교 공동체 개념보다는 모두 각자도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사부대중의 불교공동체라는 공심(公心)에서 불교의 백년대계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는 불교인의 반야지혜일 것이다. 정보화된 현대사회에서 불교계 지도부가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교육을 깊은 안목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불교계 소외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과 같이 법으로 보호받으려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문제는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저변 확대로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길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될 때 불법(佛法)은 유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종교로서 우리의 후손에게 길이 이어질 것이다. 이 점에 있어 필자는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사부대중이 불교 공동체에서 똑같이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갖도록 하는 불교 조직 내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제시된 저변 확대의 방안들은 종단 지도부가 바뀌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제도적인 차원으로 추진되고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차츰 불교는 기독교와 같이 한국사회에 영향력이 확실한 종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조준호 |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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