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융기, 황제가 되다

709년 토번(吐蕃, 오늘날의 티베트)의 사신이 당(唐)나라의 금성공주(金城公主)를 모셔가기 위해 장안(長安)에 왔다. 금성공주의 아버지는 빈왕(邠王) 이수례(李守禮, 672~741)이고 할아버지는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으로, 무측천(武則天)이 곧 증조할머니가 된다. 그녀는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의 양녀가 되어 토번의 왕자이자 최고지도자인 찬보적덕조찬(贊普赤德祖贊, 698~755)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왕녀를 시집 보내야할 만큼 토번과의 우호관계가 매우 중요하였다. 토번은 이미 7세기 중엽에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중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도 토번과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 왕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냈었다. 641년의 일이다. 8세기에 들어서 토번은 더욱 강성해져 당나라를 제압하고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만큼 무측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중종에게 이번의 혼례는 매우 중요한 외교행사였다.

금성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장안에 온 토번의 사절단에는 격구(擊毬)팀도 있었다. 격구는 마구(馬球)라고도 하는데, 말을 타고 공을 쳐서 상대의 골에 더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경기이다. 오늘날 폴로 경기의 원형이라 하겠다. 토번이든 당나라든 모두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후예들로 격구는 그들의 맥박을 뛰게 하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의 선린 외교에는 대개 격구시합이 행해지곤 하였다. 이때도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대명궁(大明宮) 이원(梨園)의 격구장엔 여지없이 시합이 벌어졌다. 토번의 국가대표팀과 당나라 황실근위대 격구팀이 혼례를 축하하고 우정을 다지는 친선경기를 열었던 것이다.

한·일 간의 친선축구시합이 단순한 친선경기인 적이 있었던가. 한국이든 일본이든 비록 친선이라고 하여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처럼 당시 토번과 당나라도 그랬다. 경기는 당나라의 패배, 토번의 압승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갈 즈음 당나라 쪽에서 한 선수를 교체했다. 이후 격구장에서 일어난 상황을 봉연(封演)의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는 이렇게 전한다.

토번의 사자가 금성공주를 맞으러 왔을 때, 중종은 이원정(梨園亭)에서 격구 경기를 벌였다. 당 팀의 형세가 기우는 것을 본 황제가 왕자를 내보내자, 동서로 뛰고 달림에 바람이 일고 번개가 치는 듯, 아무도 당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일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는 왕자는 이융기(李隆基, 685〜762)였다. 이융기.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의 셋째 아들로, 중종의 조카이며 무측천의 손자다. 훗날 아버지를 이어 6대 황제 로 등극하니 바로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 당 현종(唐玄宗, 재위 712∼756)
현종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격구는 특히 좋아하는 운동이어서 황제가 되고난 후에도 자주 격구를 즐겼다. 격구는 워낙 위험한 경기여서 시합 중에 죽거나 상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다. 황제의 측근인 환관 고역사(高力士)를 비롯 신하들의 만류가 빗발쳤지만 현종을 막지 못했다. 누가 그 뜨거운 피를 식힐 수 있었겠는가.

격구만이 아니었다. 현종은 잡기(雜技)란 잡기는 하지 못하는 게 없고, 악기(樂器)란 악기도 다루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하지만 이런 정도는 현종 이융기의 재능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

토번과의 격구시합이 있기 4년 전인 705년 이융기의 할머니 무측천(武則天)이 죽었다. 당시 82세. 중국의 유일무이한 여황제(女皇帝)로, 권력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냉혹함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자. 친자식 죽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던 이 여인에 의해 이미 첫째와 둘째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3남 이현(李顯)이 제위를 계승하였다. 바로 중종이다. 중종은 무측천 생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 중종과 예종의 재위기간이 둘로 나오는 것은 어머니 무측천에 의해 등극하였다가 폐위되고. 어머니 사후에 다시 등극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무 씨의 천하 대주(大周)가 있었다. 이제 무측천이 죽고 천하는 다시 이 씨의 것이 되었다.

무측천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당나라의 여인들의 열정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이 두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인류역사상 여인들에 의한 가장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을 때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서안의 박물관에서 당나라 여인상을 보며 느꼈던 당당함과 여유, 그리고 자신감. 당나라 여자들은 결코 남자의 그늘 밑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중종은 그의 아내인 위 황후(韋皇后)와 딸 안락 공주(安樂公主)에 의해 암살당한다. 엄마와 딸이 단 하나뿐인 최고 권력을 위해 남편이자 아버지를 독살한 것이다. 그녀들은 스스로 무측천처럼 여황제가 되고자 하였다. 그녀들은 중종의 아들 온왕(溫王)을 제위에 앉히고 당시 상왕(相王)이었던 이융기의 아버지 이단(李旦)도 해치려 하였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이융기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는 무측천의 딸, 즉 고모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손잡고 위황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제거한다. 그리고 아버지 이단을 제위에 앉히니, 바로 예종이다. 중종이 독살된 지 불과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융기의 정확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해치우는 추진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물론 평소에 쌓아둔 리더십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주도면밀하게 이융기는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를 제위에 앉힌 지 2년 만에 태상황으로 봉하고 본인이 등극하였다. 712년,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 태평공주와 그 측근마저 제거하고 무측천 이래 반세기 동안 진행된 여인 천하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 현종 이융기. 그는 남자가 매력적일 수 있는 요소 전부를 다 갖춘 남자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성, 야성, 몸과 마음, 심지어 영혼의 요소까지. 그리고 결정적인 것, 결코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왕족의 혈통까지, 그는 갖추지 못한 게 없었다. 타고난 자질에 남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열정이 더해졌다. 일례로 현종은 갈고(羯鼓)라는 악기 - 북처럼 생긴 타악기 - 를 배우면서 부러뜨린 북채만 여러 궤짝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비파의 명인이며 피리의 마에스트로였음에도 말이다.

현종이 이끌던 당나라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었다.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하였으며, 문화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른바 ‘개원(開元)의 성세(盛世)’와 필적할 만한 시대가 얼마나 될지 한번 되돌아보면, 그의 시대가 어느 정도로 위대하고 화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의 최전성기, 인도의 최극성기, 서양의 르네상스. 그 어느 것도 문화의 상대적 가치는 필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문화융합만큼은 현종의 통치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 당시 수도 장안에는 동쪽 끝 일본에서부터 멀리 서쪽 로마까지 전 세계의 온갖 민족이 다 모여들었다.

오릉의 젊은이들 서시 동쪽 지날 때 五陵年少金巿東
은안장에 백마 타고 봄바람을 가르네 銀鞍白馬度春風
떨어지는 꽃잎 밟으며 어디로 놀러가나 落花踏盡游何處
호희 술집으로 웃으며 들어가네 笑入胡姬酒肆中

이백(李白)의 〈소년행(少年行)〉으로, 당시의 귀족 자제들의 행락을 읊은 시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호희(胡姬)는 서역의 여자들을 가리킨다. 주로 페르시아, 즉 이란계 여인인데, 이백(李白)의 시에는 이 호희들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장안에는 술 파는 호희가 수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는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대명궁(大明宮)엔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료와 학자, 문인과 예술가들이 수천수만을 헤아렸다. 미관말직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요직까지도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국방을 책임지고 군사를 통솔하는 자리도 외국인에게 맡겨졌으니,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활약하던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이런 개방성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부른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였지만, 그 개방성과 융합성은 실로 독보적인 것이었다. 전 세계의 서로 다른 민족과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사상, 예술, 문화가 한 데 모여 한층 차원 높은 종교와 사상, 예술과 문화를 창조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정점에 이융기, 현종이 있었다.

2. 양옥환, 귀비가 되다

중국 최고의 미인하면 대개 양귀비(楊貴妃)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함께 흔히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양귀비의 미모가 가장 출중했었나 보다.

황제는 미모를 중히 여겨 경국지색 그리며 漢皇重色思傾國
다년간 구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御宇多年求不得
양씨 가문에 막 피어난 딸 있었으나 楊家有女初長成
집안 깊이 길러 사람들은 알지 못했네 養在深閨人未識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天生麗質難自棄
하루아침에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一朝選在君王側
눈웃음 한 번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생기니 回眸一笑百媚生
육궁의 단장한 미녀들은 얼굴을 들 수 없었네 六宮粉黛無顔色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는 이렇게 시작한다. 양귀비의 미모는 여섯 궁전의 예쁘게 단장한 미녀들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고 하는데…. 시인의 상상력이 그려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경국지색은 아마도 이럴 거라는 상상. 시인은 어쩌면 모든 남자들의 로망을 양귀비에게 투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양귀비는 실상 뚱녀였다. 연수환비(燕瘦環肥), 조비연(趙飛燕)은 말랐고 양옥환(楊玉環)은 살쪘다는 말처럼 그녀는 상당히 풍만하였다. 옥환은 양귀비의 이름이다.

물론 당시에는 풍만함이 미인의 표준이었다. 당나라 여인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둥근 얼굴, 작은 눈, 풍만한 몸매를 하고 있다. 당대(唐代)에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되는 여인의 모습이 어떨지 알고 싶다면, 곧 관세음보살상을 상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 당대(唐代)의 화가 주방(周昉)의 〈잠화사녀도(簪花士女圖)〉 부분. 당시 장안(長安)의 귀부인들의 모습이다.

물론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풍만함이 당대 아름다움의 기준이라고 해도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불릴 만큼 양귀비의 미모가 출중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궁궐의 그 많은 미녀들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의 미모라면 처음부터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양귀비가 현종의 눈에 든 것은 그녀가 궁궐에 들어온 지 6년이 지나서이다. 그녀는 황제의 며느리로서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아내로 이미 6년을 살았다. 그 사이에 현종은 사랑하던 부인 무혜비(武惠妃)를 잃었다. 전설에 의하면 현종의 측근인 환관 고역사(高力士)가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해 미모가 출중한 양귀비를 꼬여내어 현종 앞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에서도 이 부분이 상당히 비중 있게 그려지는데, 과연 그럴까?

실제 양귀비의 미모가 그렇게 출중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현종을 사로잡은 그녀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렇다. 춤이었다. 양귀비의 양자로 양귀비와의 불륜설이 뒤따르는 안녹산(安祿山)은 호선무(胡旋舞)를 잘 추었다고 한다. 호선무란 매우 가볍고 빠르게 도는 춤으로 양귀비 또한 호선무에 능통하였다. 춤이야말로 양귀비를 왕자비가 아닌 귀비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바람결에 소맷자락 나부끼는데 / 風吹仙袂飄飄擧
예상우의 춤추던 그 모습인 듯 / 猶似霓裳羽衣舞
고운 얼굴에 조용히 눈물방울 맺히니 / 玉容寂寞淚欄干
배꽃 가지에 봄비 방울진 듯 / 梨花一枝春帶雨

예상우의(霓裳羽衣)는 무지개로 만든 치마와 새 깃털로 만든 옷이란 뜻이다. 하늘을 나는 선녀가 입고 있는 바로 그 옷이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처럼 이 옷을 입어야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추석날 도사 나공원(羅公遠)이 현종과 함께 달나라 광한궁(廣寒宮)에 갔는데, 넓은 뜰에 선녀 수십 명이 비단 무지개 치마를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한다. 나공원이 춤곡의 이름을 묻자, 예상우의라고 하였고, 나공원은 그 음악을 기억하고 돌아와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혹은 현종이 지었다고도 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현종이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공원은 생몰연대가 매우 불분명한 전설상의 인물이지만, 현종은 실존하는 인물이며, 실제로 예술에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현종 작곡 양귀비 안무. 이것이 예상우의곡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실상이 아니었을까.

3. 페르소나(persona), 그리고 자기〔self

일본 영화 <쉘 위 댄스>는 무기력증에 빠진 중년 남자가 춤을 배우며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이다. 평생 성실하게만 살아온 이 남자가 중년의 나이에 새삼 댄스 교습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왜일까? 무엇이 그를 춤으로 이끄는 걸까?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일상이 지루한 고전문헌학 선생이 처음 본 여자가 남긴 기차표 한 장을 들고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 중년의 남자를 미지의 세계로 뛰어 들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자기〔self〕가 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융에 의한다면 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persona)를 번갈아 사용하며 살아간다. 페르소나란 가면이란 뜻으로 내가 사회와 관계를 맺는 여러 얼굴을 나타낸다. 즉 나는 한 여자에겐 남편의 페르소나, 아들딸들에겐 아빠의 페르소나, 학교에선 선생님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간다. 친구의, 자식의, 직장 동료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간다. 페르소나는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필수불가결한 내 모습이다. 페르소나가 잘 형성되지 못하면 사회 부적응자가 된다.

하지만 페스소나가 형성되는 만큼이나, 우리는 본래의 자기로부터 멀어진다. 페르소나가 가면이란 의미인 것처럼, 사회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해가며 살다보면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그냥 한 가정의 가장으로, 혹은 어떤 직장의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삶은 활기를 잃고, 일상은 지루해진다. 이때 운이 좋은 사람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응하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쉘 위 댄스>의 수기야마 과장이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 선생은 자기가 부르는 소리에 응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춤을 통하여, 한 사람은 새로운 만남을 통하여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잠자고 있던 영혼이 깨어난 것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만나면서 잠자고 있던 예술혼이 깨어났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자, 출중한 정치인의 페르소나가 그의 본모습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예술가로서의 본능이 현종의 본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움츠리고 있던 예술혼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발해야만 하는 시점에 양귀비가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툭 치면 톡 터질 즈음에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절실한 눈빛을 품어준 여인이 양귀비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현명한 황제 현종을 어리석은 군주로 이끈 경국지색의 요녀가 아니라, 한 남자의 본성을 일깨운 보살인지도 모른다. 본래면목을 찾도록 자신을 희생하며 인도해준 부처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토록 예술을 사랑했고 춤과 음악 속에서 살고자 했던 현종과 양귀비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정치를 등진 어리석은 군주이며 양귀비는 현명한 황제를 혼탁한 군주로 전락시킨 미녀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뭐가 실상이고, 무엇이 중한지도 모른 채 말이다.
양귀비는 정치적 야망도, 권력에의 의지도 없었다. 그녀는 다만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현종이 만약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여생을 양귀비와 함께 음악을 작곡하고 안무를 구상하며 살았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너무 긴 시간을 현종은 황제로 살았다. 개인 이융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어쩌면 긴 시간을 가면 속에서 살아서 자기를 보면서도 자기인줄 모르고 지나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를 찾기도 어렵고, 돌아가는 일은 더욱이나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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