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한국, 2008)은 폐쇄수도원 카톨릭 수사들의 일상을 3시간여 보여주었던 <위대한 침묵>과 유사한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바쁘게 흐르는 시간에 익숙하기에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 속 시간은 사지가 뒤틀릴 정도로 지겨웠지만 그 지겨움이 끝날 무렵엔 마음이 한결 맑고 가벼워졌습니다. 일종의 ‘힐링 무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은 다큐멘터리영화가 아니지만 그 시선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사실적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보여주려고 애쓴 감독의 고집이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히말라야고원에 위치한 고즈넉한 산간마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주인공 최(최민식)의 여행자로서의 일상을 담백하고 조용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히말라야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찾고 싶어서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무기력한 자아를 버리고 생기발랄한 자아를 회복해서 돌아오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목적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주인공 ‘최’는 꽤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기러기 아빠로 살고 있던 최는 어느 날 직장까지 잃었습니다. 직장에서 서류 상자를 들고 나올 때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고, 빈 집에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은 외로운 처지라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삶이 이 시대 가장들의 불행이고, 최는 그들의 지친 삶을 보여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다람쥐 바퀴에 갇힌 다람쥐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크게 보면 현대인의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시스템에 갇힌 채 감정도 생각도 없이 그저 그 시스템을 무기력하게 따르는 것 같은 일상엔 행복도 생기도 없는 것입니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동생의 공장에 들렀다가 식당 한쪽에 차려진 외국인노동자의 빈소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최는 네팔 노동자 도르지의 유골을 안고 카트만두에 있습니다.

그런데 최는 왜 네팔로 간 것일까요? 자신이 굳이 유가족에게 유골을 전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자처한 것일까요?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죽음을 맞은 도르지의 처지에 공감했다가 하나입니다. 최 또한 기러기 아빠로서 외로운 처지였기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르지가 돼 그의 가족을 만나러 가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최가 직장을 잃고 코너에 몰려 있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 출구를 히말라야로 본 것입니다.

도르지의 고향인 자르코트 마을은 해발 3,300미터에 위치한 고원지역입니다. 최가 이곳으로 가는 과정을 영화는 꽤 오랜 시간 롱테이크로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하는 통과의례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가 그동안 살았던 곳은 문명세계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지배적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최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문명세계에서 온 최는 구두와 양복을 입고 히말라야에 올랐습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 것입니다. 그는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최는 산을 오르면서 고산병을 만났습니다. 두통이 오고 토하기도 하고, 마침내 쓰러져 코피까지 쏟았습니다. 자신의 가방을 포터에게 맡기고 맨 몸으로 걷는데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 보였고, 결국은 지나가던 말 등에 엎드려 도르지의 고향집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해서도 이틀 동안 그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최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세 사람의 낯선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도르지의 아버지와 부인인 페마, 그리고 이 집에서 짧은 영어로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되는 어린 아들 덴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란 얼굴로 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구고, 이곳에 왜 왔는지를 묻는 것 같았습니다.

최는 가족에게 도르지의 사망 소식과 유골을 전해주기 위해 가방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들에게 유골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들에게는 도르지의 선물이라면서 축구공을 주고, 도르지의 아내인 페마에게는 돈봉투를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곳으로 여행을 왔고 도르지는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최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도르지 가족에게 유골 대신 돈과 축구공을 주었습니다. 죽음 대신 물질을 건넨 것입니다. 최의 의식엔 죽음은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것이고, 물질은 행복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은 문명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는 히말라야 고원에 사는 티베트 가족을 통해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고향집에는 도르지의 엄마도 살고 있었는데 최가 도착했을 때 이 안 노인은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도르지의 아버지는 하루 종일 기도바퀴를 돌리며 죽어가는 부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가끔은 티베트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르지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장례식 또한 참 자연스럽게 치러졌습니다. 아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던 남편이 손수 시체를 염하고, 스님들이 와서 기도를 해주고, 그리고 티베트를 상징하는 깃발 룽다를 휘날리며 죽은 자는 히말라야 더 깊은 산 속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도르지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입니다. 가족 어느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편조차 너무나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 문명세계 사람들과는 다른 듯 했습니다.

마당에서 피리를 불던 덴징과의 대화에서 티베트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드러났습니다. 어린 소년은 사람이 죽으면 히말라야 산 속 저 너머로 간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사람의 영혼을 그리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업을 정화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업이 닦인 영혼은 다시 바람의 안내를 받으며 땅으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윤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통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차마 말할 수 없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도르지의 죽음 또한 아버지가 먼저 알아냈습니다. 밖에서 돌아왔을 때 최는 자신이 꼭꼭 숨겨두었던 도르지의 유골함이 나와 있고, 도르지의 아버지와 아들 덴징, 그리고 페마가 장례를 치르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아들 덴징은 아버지의 죽음에 울음을 보였고, 아내 페마는 마을 사찰로 달려가 커다란 기도바퀴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담하게 아들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미 죽을 걸 예상했던 도르지 어머니의 죽음과 달리 도르지의 죽음은 가족들에겐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도르지는 이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예상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기도를 하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잘 이겨냈습니다.

최가 이곳 히말라야에 온 이유는, 자신의 삶을 어렵다고 생각했고, 일종의 도피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도르지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문제 정도를 갖고도 그는 감당이 안 되는데 도르지 가족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겪을 고통은 짐작이 안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아버지는 침착하게 아들의 장례를 지냈고, 아내 페마 또한 남편이 죽었지만 자신의 일상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시아버지 음식을 장만하고, 물론 가끔 지나가는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긴 했지만 이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덴징 또한 돌아가는 최를 위해 피리를 불어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고통에 대한 회복력이 대단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히말라야는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안 보이고 돌산이었습니다. 물론 농토도 있고, 설산에서 흘러내린 강도 보였지만 대부분 땅이 황무지였고, 바람소리만 요란했습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들은 순리를 따르는 데 익숙해진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은 언제든 변덕을 부리는 것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변화를 수용하는 것 이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 또한 변화의 한 장면이고, 그것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은 아들의 죽음을, 남편의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영화는 스토리라고 할 게 없습니다. 도르지 어머니의 죽음이나 도르지의 죽음 등의 에피소드가 끼어있긴 하진만 대부분은 무심한 일상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도 최가 도르지 가족들과 함께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던 장면, 도르지의 아버지가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하루 종일 기도바퀴를 돌리던 모습, 페마가 어린 아들에게 젖을 물리던 모습, 덴징이 마당에서 피리연습을 하던 모습 등 가족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초연하게 이겨내던 가족들의 힘은 견고한 일상의 행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에겐 일상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없는 집엔 덩그러니 텔레비전이 있을 뿐이고, 혼자 먹는 밥에서 일상의 행복을 찾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최가 그토록 무기력했던 것입니다.

자르코트 마을로 갈 때와 달리 산을 내려올 때 최는 혼자서 내려왔습니다. 올라갈 때는 포터가 짐을 들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말 등에 타고 정신없는 상태로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혼자서 가볍게 내려왔습니다. 이를 통해 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갈 때는 자기 한 몸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고, 에너지는 부족했습니다. 살아있지만 산 게 아닐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히말라야에서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가볍게 자기 몫의 짐을 지고 산을 내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을 얘기하면, 최는 히말라야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어서 내려왔고, 그것은 자기 몫의 삶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와 ‘일상의 행복을 회복해야 한다’였습니다. 도덕이나 관념의 무게감을 던지고 사소하지만 빛나는 일상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는 것을 히말라야에서 만난 티베트인 가족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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