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송조(宋朝)의 공차(貢茶)

송나라 때의 공차(貢茶)는 앞 시대였던 당대(唐代)의 공차를 기반으로 하여 더욱 진화, 발전하게 되었다. 의흥(義興)의 양선차(陽羨茶), 호주(湖州) 고저(顧渚)의 자쟁차(紫箏茶) 및 사천의 몽정차(蒙頂茶)를 당대에 이어 지속적으로 최상의 공차로 유지한 것은 물론, 새롭게 ‘건차(建茶)’를 공차의 최상품으로 만들어냈다. 건차는 ‘건안(建安)’1)에서 생산된 상급의 공차이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 정부는 바로 이곳 ‘건안(建安)’에 관이 직접 관리·감독하여 차를 홍배하는 ‘관배(官焙)’2)를 설치하였다. 또 그 곳에 ‘어다원(御茶園)’을 건립하여 운영하였는데 그 규모가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역에 동원된 인원 또한 엄청난 숫자였다고 전한다. 그 규모가 실로 의흥(宜興)과 장흥(長興)의 고저(顧渚) 공다원(貢茶園)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방대하였다고 한다. 북송 때, 조여려(趙汝礪)가 쓴《북원별록(北苑別錄)》의 기록에 의하면, “건안의 동쪽 30리에 봉황(鳳凰)이라는 산이 있다. 그 아래가 곧장 북원(北苑)이며, 여러 차 공장들이 줄이어 있다.”3)고 하였다.

이 기록은 과거 송대(宋代)의 공다원(貢茶園)이 얼마나 번성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기록하기를, “그곳의 토양은 붉은 흙이니, 그곳의 차는 그야말로 으뜸 중에서 으뜸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976~984년) 연간에 처음으로 ‘어용(御用) 제다원(製茶園)’이 되더니, 해마다 봉황의 형태로 박아내어 공물을 대광주리에 담아서 조공함으로써 갈수록 진귀하고 이상한 물건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4) 고 하였다.

또 기록하기를, “경력(慶曆:1041~1048년) 연간에 조운총독(漕運總督)5) 은 그 일을 더욱 중하게 여겨서 품목과 수량은 날로 늘어나고, 만드는 법도 더욱 면밀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차로는 북원에서부터 진상되는 것이 천하에서 홀로 으뜸가는 것이라, 세간에서는 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6)고 했다.

위의 이 기록을 통해 송나라 왕조가 얼마나 공차(貢茶)를 중요시 했으며, 그 제다와 생산의 발전 및 차 품질의 고급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건안지(建安志)》의 기록에도 공차의 고급화와 차별화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기록들이 보인다.

“송 태종 태평흥국 2년(977)에 ‘용배(龍焙)’를 처음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북원에서 용봉단차를 만들어 진공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일반 서민들이 마시는 차와 구별 되었다. 이후 제다의 기술이 더욱 개진(改進)하여, 공차의 종류와 품종이 더욱 새롭게 바뀌었다.”7)

그리고 또 기록하기를, “송나라 지도(至道) 초년(995)에는 황제 칙령을 내려 ‘석유(石乳)’공차를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으며, 이어서 ‘경정(京鋌)’, ‘적유(的乳)’, ‘백유(白乳)’ 등의 공차 품목들도 만들어 바치도록 하였다.”8)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송나라 황제들이 공차(貢茶)의 ‘품질 고급화’와 ‘사치(奢侈)’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를 잘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건안지(建安志)》에는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에 채양(蔡襄)이 정위(丁謂)9)가 창조한 ‘대용단(大龍團)’을 개조하여 ‘소용단(小龍團)’을 만들었다. ‘대용단’은 8병이 한 근이 되고, ‘소용단’은 더욱 더 섬세 화되어 보통 20병이 한 근의 무게가 되며, 황금 2냥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를 두고 ‘금(金)은 구하기 쉬워도, 차(茶)는 구하기 어렵다.’라고 한다.”10)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그야말로 송나라 때, 차의 고급화와 사치화가 얼마나 극성을 이루었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때, 송자안(宋子安)이 쓴《동계시다록(東溪試茶錄)》에 의하면, “송나라 초기에 ‘관배(官焙)’와 ‘사배(私焙)’가 모두 합하여 1,336곳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송나라 태종 태평흥국에서 인종 경력까지 건안 봉황산 북원에 건립된 어다원(御茶園) 소속 관배(官焙)의 공차 품목, 수량, 채적 시기, 제다기술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바로 송대 공다원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이상에서 나열한 몇몇 문헌 외에도, 송대(宋代)의 차에 대한 기록, 특히 공차에 대한 기록들은 역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많다. 특히, 차의 재배와 제다법, 그리고 음다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의 재배방법과 더욱 섬세화된 차의 제조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 추구하고, 발전시켜 왔다. 대략적인 일감으로 보아도 송대는 차의 종류와 품질에 있어서, 아마 현대를 능가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 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일면에서만 보면, 송대 공차 기술의 발전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차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 또한 현대사회에까지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가치의 평가는 단연히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또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곤고함을 돌아보지 않고 사치의 극단을 추구한 나머지 그 병폐(病廢)로 인해 나라를 이민족에게 침범 당하여, 급기야는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차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너무 차문화의 사치에 빠져 망국의 슬픔을 겪게 된 송나라를 보면, 작금의 드러나는 차문화의 사치 행각이 함께 대비되어 만감이 교차된다.

차 품질의 고급화와 사치! 늘 차를 마시며, 차를 즐기는 입장에서 늘 고민에 빠지게 하는 부분이다. 밝은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할 것이지, 왜 손가락을 보고 시비를 따지는지, ‘적당할 때 그치라’는 《중용(中庸)》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필자는 송나라의 차문화를 보면, 사람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차를 진정 즐길 줄 아는 자는 차품(茶品)의 고급화를 구하지 않는다〔眞樂茶者, 無求品高〕.”

주) -----
1) 건안(建安)’은 지금의 복건성 건구현(建甌縣)이다.
2) 관청에서 직접 관리, 운영하는 차를 제조하는 공장으로 보면 된다.
3) “建安之东三十里,有山曰风凰,其下直北苑,旁联諸焙”
4) “厥土赤壤, 太平興國中, 初爲御焙, 歲模鳳凰, 以羞貢篚, 益表珍異”
5) 조운총독(漕運總督):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시대에 곡물 운반을 담당하는 전운사(轉運使)와 같은 관리와 같음.
6) “慶曆中, 漕台益重其事. 品數日增, 制度日精. 厥今茶自北苑上者, 獨冠天下. 非人間所可得也.”
7) “宋太宗太平興國二年, 始置龍焙, 遣使卽北苑造龍鳳團茶入貢, 以別庶飮. 而後製茶技術改進, 貢茶花色品種換新.”
8) 宋至道初,皇帝下詔督造 “石乳” 貢茶. 繼而有 “京鋌”, “的乳”, “白乳” 等 貢茶品目.
9) 정위(丁謂:966~1037년): 송나라 시기의 소주(蘇州) 장주(長州)인. 지금의 강소성 소주.
10) 宋仁宗慶曆年間, 蔡襄將丁謂創造的大龍團改造爲小龍團. 大龍團八餠爲一斤, 而小龍團更爲精緻, 凡二十餠重一斤, 値黃金二兩, 正所謂 “金可得而茶不易得也.”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