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의 《오세암》은 아름다운 동화이다. 오세암을 배경으로 한 설화를 고 정채봉 동화작가가 각색한 작품이다. 실제로 오세암의 원래 이름은 관음암이었다고 한다. 오세암이란 이름은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눈 먼 누나 감이와 다섯 살 철부지 길손이는 엄마를 찾기 위해 길 위를 떠돈다. 그런데 작품 속의 엄마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앙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바닷가에서 갈매기를 보고서 길손이가 “갈매기는 좋겠다. 날개가 달렸잖아. 날개가 있으니까 바람을 타고 엄마 있는 데까지 금방 갈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이나, 눈 먼 누나 감이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고서 길손이가 ‘나쁜 애들도 엄마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남매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다.

감이와 길손의 그리움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열두 살 감이는 엄마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엄마가 그립다. 엄마의 기억이 전혀 없는 길손의 소원은 단 한 번이라도 엄마를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그립다. 감이와 길손은 서로가 세상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감이와 길손이 설정 스님을 따라서 설악산의 한 사찰로 들어가면서 엄마, 즉, 모성(母性)은 불교신앙의 하나인 관세음보살 신앙으로 환치된다. 스님들의 고무신을 나무에 거는 등 매일 말썽을 피우는 까닭에 길손은 설정 스님을 따라서 관음암으로 가게 된다. 설정 스님은 귀신이 사는 방이라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길손은 그 방에 걸린 관세음보살 탱화를 보고서 엄마라고 부른다. 설정 스님이 생필품을 사러 나간 사이 폭설이 내리고 결국 길손은 눈 내린 관음암에 갇히고 만다. 감이와 다시 관음암을 찾은 설정 스님이 막 길손이를 부르려는데 법당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살며시 걸어 나오는 발, 길손이의 빨간 맨발을 본다. 길손은 말한다.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 주었어요. 누나, 나는 엄마를 만났어.”

그때 탱화주변에서 빛이 새어나오더니, 하얀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소리도 없이 나타나 길손이를 가만히 품에 안으며 말한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도 얘기해 주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꽃과 대화를 나누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과연 이 어린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모성과 관음사상이 합일하게 된다. 설정 스님에게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관음보살로, 감이에게는 엄마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만난 뒤 감이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감이가 처음으로 본 것은 파랑새로 몸을 바꾼 관세음보살이다.

“네, 스님 모든 게 보여요, 햇빛도 보이고 스님도 보여요. 마루 위에 잠이 들어 누워 있는 길손이도 보여요.”

눈을 뜨게 되었지만 감이는 길손이가 설명해 주던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이 세상의 풍경이 실망스러워 더욱 길손이를 그리워해야 했다.

《오세암》이 빼어난 동화인 이유는 불교적인 제재를 다뤘으면서도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추천사에서 “오세암은 설악산에 있는 한 암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진정한 오세암은 다섯 살 동자의 때 묻지 않은 천진한 그 마음에 있다. 그리고 오세암의 내력을 세상에 널리 전해 준 정채봉의 따뜻하고 선량한 그 눈에도 있었다. 그 눈이 그립다.”라고 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큰 축복이다. 이제 비록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지만 동심을 담은 그의 글이 남아 우리에게 여전히 읽혀진다는 것에 다시금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했다. 순수한 동심이 법정 스님에게는 천진불이고, 김수환 추기경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감이가 막상 눈을 뜨고 나서 이 세상의 풍경에 실망하고, 더욱더 길손이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지 의아해야 한다.

길손이는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다”고 표현했고, 바람이 부는 것을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이라 표현했다. 길손이는 육근(六根)에 의지해 사물을 바라보되 육근을 초월해 공감적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이미 심안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때 묻지 않은 마음이 바로 심안의 개안임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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