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스님 중창…장육상·천왕상·목탑 등 조성·봉안
옥문지는 다 메우지 못한 못…온천 솟는 곳일 수도
 

당 태종 이세민은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재위 626~649)이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묘호가 태종(太宗)이다. 고조 이연(李淵)을 도와 당을 건국한 태종은 618년 현무문(玄武門)의 난을 일으켜 즉위했다. 이세민은 무능하고 매사에 건성건성했던 형 이건성이 태자로 책봉된 후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형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쏴 죽였다. 고조는 이방원에게 양위한 태조 이성계처럼 이세민에게 양위하였다. 태종은 재위 기간 중 돌궐(突厥)을 몰아내며 중국을 통일하였다.

태종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태종은 태자로 책봉한 큰아들이 모반에 연루되자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 이치(李治)를 태자로 삼았다. 이치가 고종(高宗)이다. 그러나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고종이 죽자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자신이 옹립한 황제들을 페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무주’로 고치는 전무후무한 ‘여난’을 일으킨다. 신라 선덕여왕을 희롱하고 능멸한 죄값을 치룬 것일까? 역사가 가운데 그런 평가를 아무도 하지 않는 듯한데 왜일까? 여하튼 당 태종은 야사(野史)에 살아서 연분 관계가 있었다는 그 며느리한테 된 통 당한다. 선덕여왕에게 세 가지 색깔의 모란 그림을 보내고 나비를 그리지 않게 한 죄 값을 톡톡히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이혜동진(二惠同塵)> 조에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사모하여 그 사랑의 불길로 영묘사를 태우고 자신은 화귀(火鬼)가 되었다”고 한다. <영묘사장육> 조에서는 영묘사 창건이 나라의 화젯거리가 될 만큼 큰 공사였다고 전한다. 결국 마야부인의 딸인 선덕여왕이 애써 만든 절을 지귀가 태운 것이 된다. 지귀는 누구일까? 혹시 진지왕의 서자인 비형랑이 아닐까? 귀신을 잘 부리던 그로서는 계속된 진평왕과 선덕여왕의 쇼가 엄청 가증스럽지 않았을까? 지귀가 화귀가 되었다는 말은 거꾸로 화귀가 지귀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다. 당시에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던 자는 비형랑 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영묘사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양지(良志)가 만든 금당(金堂) 장육삼존불(丈六三尊佛), 천왕상(天王像),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가 있었다.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향가인 <풍요(風謠)>를 지어 불렀던 것으로 유명하다. 후대에도 양지 스님이 만든 불상 등이 남아 있었던 것을 보면, 불이 난 다음에 양지 스님이 중수불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보면 비형랑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 두두리들이 만들고 화귀가 태운 영묘사를 양지 스님이 중창불사한 것은 비형랑의 종말과 관련될 듯 싶다. 비형랑은 진지왕계의 상징이자 무속세력의 중심이 아니었을까? 선덕여왕의 즉위로부터 불교의 홍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치된 세력이었다고 보면 어떨까?

한편,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는 “양지는 또 글씨에도 뛰어났고, 영묘사의 장육삼존과 천왕상 및 전각의 기와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낸 것이다. 또한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하나의 작은 탑을 만들고 이와 함께 3,000개의 불상을 만들어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빚어 만들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잡념 없는 상태에서 진흙을 주물러 만들었기 때문에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쌓으면서 이러한 풍요를 불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내에 조목들이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편집된 증거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영묘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커다란 연못이었으므로 옥문지(玉門池)는 연못을 메꾸지 못한 부분일 것이다. 아무리 메꿔도 메꿀 수 없을 정도로 샘이 솟아올랐기에 그대로 연못으로 놔둔 자리일 듯 싶다. 따라서 그렇게 풍부하게 샘이 솟는 곳이기에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여성의 성기를 이름으로 따서 옥문지로 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음습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는 것은 이곳이 작은 온천이 샘솟는 곳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능했을까? 한번 온천인지 아닌지 지질학적인 검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상기후’로 봐야 할 것이지만 그건 나중 문제일 듯 싶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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