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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맑은 마음에 계합하는 법문〔契此淸心法門〕
“가사 아래에서 사람 몸을 잃는 것이 고통”
2017년 05월 31일 (수) 14:00:48 이상하 ksce21@hanmail.net

대저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젊던 얼굴이 쉬지 않고 변천해 가니, 달리는 말과 같다느니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느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과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무상이 신속함을 말한 것이며, 똥 무더기 같다느니 꿈속 같다느니 원수와 같다느니 독사와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허망하여 좋은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나는 말이 없고 싶다.” 하였고, 또 “오로지 주장함도 없고 오로지 부정함도 없다.” 하였으며, 장자는 “현주(玄珠)를 잃었는데 망상(罔象)이 찾았다.” 하였고, 또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불법을 배우는 사문(沙門)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응당 본래 마음을 궁구해서 정밀히 연마하여 명묘(明妙)해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백천 가지 삼매(三昧)와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얻어질 것이니, 모든 불조(佛祖)가 어찌 특이한 사람이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성인의 시대와 멀어져 출가한 사람들이 자기의 본분은 알지 못하고 그럭저럭 한가로이 지내다 일생을 보내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매몰되어 밝혀지지 못하고 오로지 허위와 사악(邪惡)의 습성이 들었으며 심한 자는 도리어 불법을 비방하니, 슬프다! 말을 할 수조차 없구나.

육조 대사는 “앞 생각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깨달으면 부처다.” 하였고, 위산 선사(潙山 禪師)는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묘(妙)로 신령한 광염(光焰)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여,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性)·상(相)이 항상 머물고 사(事)·리(理)가 둘이 아니라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 하였으니, 그 빛을 얻으면 하루아침에 제불(諸佛)과 같아지고 그 빛을 잃으면 만겁(萬劫)토록 생사를 따르고 말 것이다.

용이 뼈를 바꿀 때 비늘은 바꾸지 않듯이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됨에 그 얼굴은 바꾸지 않는 법이니,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요 허깨비처럼 덧없는 이 육신이 곧 법신(法身)이다. 이 도리는 너무 가까이 있으니 눈을 뜨면 곧 보고 눈을 감은 곳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로 너이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들은 이루 다 인용할 수도 없거니와 모두 범부를 고쳐 성인을 만드는 직절(直截)한 도리이다.

고인들이 이와 같이 노파심으로 고구정녕(苦口丁寧)히 간절히 말했으니, 이러한 가르침들을 외워서 학습하고 돌이켜 궁구하며 선각(先覺)들을 두루 찾아가 물어서 분명히 결택(決擇)하여 도를 깨닫겠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탁마(琢磨)한다면 그 누군들 도를 이룰 수 없으리오. 현우(賢愚), 귀천, 노소,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슬프다!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으니, 응당 무슨 일을 해야 하겠는가. 눈이 색(色)에 끌려가면 아귀가 되고 귀가 소리를 따르면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들어간다. 그런데 색과 소리라는 짐주(鴆酒)에 취하고 수(受)와 상(想)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정신이 흐려서 깨닫지 못하고 오늘도 이와 같이 보내고 내일도 이와 같이 보내다가 납월 30일(죽음)에 이르면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고 오장이 칼로 저미는 듯 아프고 손발을 잡아 뽑는 것과 같아 마치 끓는 물속에 떨어진 게처럼 발버둥도 칠 수 없고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거북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정신이 혼미하여 천당에 올라가는지 지옥에 들어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아아 안타까운 일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를 깨달은 옛날의 현인들은 임종할 때 앉아서 죽고 서서 죽어 마치 사람이 방문을 열고 밖에 나가는 것처럼 쉬웠다. 계 선사(戒 禪師)는 지팡이에 기댄 채 입적했고 불인 장로(佛印 長老)는 한 번 웃고 입적했으며, 어떤 이는 밥을 먹다가 수저를 멈추고는 입적했고 어떤 이는 한 쪽 발을 드리운 채 입적했고 어떤 이는 거꾸로 선 채 입적했고 어떤 이는 몇 자 높이로 허공에 뜬 채 입적했으니, 이는 모두 자기 본성을 돌이켜 궁구하여 정(定)과 혜(慧)를 온전히 갖춘 결과이다.

슬프다! 고인인들 어찌 지금 사람들과 다르리오. 동산(洞山) 화상이 “가사 아래에서 사람 몸을 잃는 것이 고통이다.” 하였으니, 잠계(箴戒)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네 번 ‘슬프다’라고 한 데에서 감회와 한이 바다처럼 크고 많건만 누가 알리오. 이 글을 써서 승화상인에게 주노라.

夫人生一世也, 壯色不停, 如奔馬, 如草露, 如西光, 無常迅速之謂也. 似糞聚, 似夢聚, 如怨賊, 如毒蛇, 謂其幻妄無好事也. 孔子曰: “予欲無言.” 又云: “無適也, 無莫也.” 莊子曰: “遺其玄珠, 罔象得之.” 又云: “天地一指, 萬物一馬.” 況我學佛沙門乎? 當究其本心, 硏精明玅, 則百千三昧·無量玅義, 不求而自得, 諸佛祖豈異人哉? 而今去聖時遠, 出家人不識自家體裁, 悠悠泛泛, 過了一生, 吾佛正法眼藏, 埋沒不明, 而全以虛僞邪惡, 習與成性, 而甚者返以誹謗. 嗚呼! 不可以言之矣. 六祖大師云: “前念迷卽衆生, 後念悟則佛.” 潙山禪師曰: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燄之無窮, 思盡還源, 性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得其光也, 等諸佛於一朝; 失其光也, 順生死於萬劫. 如龍換骨, 不改其鱗, 凡夫廻心作佛, 不改其面,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這個道理, 秪爲太近, 開眼便刺着, 合眼處亦自現成. “如何是佛?” “汝卽是.” 如是等明白指導, 不可煩引, 而皆是革凡成聖之直截道理. 古人之恁麽叮嚀苦口, 用心緊切如老婆. 誦習而返究, 博問先覺, 以決擇分明悟理爲懷, 仔細琢磨, 其成道也, 誰人無分? 賢愚貴賤老少男女, 皆有分也. 嗚呼! 薙髮染衣, 當爲何事? 眼被色牽歸餓鬼, 耳隨聲去入阿鼻, 沈醉聲色鴆酒, 堕沒受想坑穽, 昏昏不覺, 今日也如是, 明日也又如是, 乃到臘月三十日, 頭痛額裂, 肝腸痛切, 手脚抽牽, 懡㦬如落湯螃蠏, 痛忍如生脫龜皮, 神識昏迷, 上天入獄, 摠不曉得. 嗚呼惜哉! 回憶古賢於臨終也, 坐脫立亡, 容易如門開人出相似. 戒禪師倚杖而化, 佛印長老嘕然一笑而去, 或停筯而逝, 垂足而寂, 倒立而滅, 去數尺而亡, 皆以返究自性, 學全定慧之致也. 嗚呼! 古人豈異於人哉? 洞山和尙云: “袈裟下失人身是苦也.” 可以箴戒. 如上四箇嗚呼也, 感恨如海, 誰知之? 書此以贈承華上人.

해설

이 글의 제목은 선학원본에는 <승화상인에게 주다[贈承華上人]>로 되어 있다. 경허 스님 특유의 사람을 감동시키는 간절한 법문이다.

이 글은 평이(平易)하여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므로 《논어(論語)》와 《장자(莊子)》에서 인용한 대목만 대략 설명하기로 한다.

공자(孔子)가 “나는 말이 없고 싶다.” 하니, 자공(子貢)이 “스승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전해 받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시가 운행하고 만물이 생장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라 하였다. 또 공자는 “군자는 천하의 모든 일에 있어서 오로지 주장함도 없고 오로지 부정함도 없어서 옳은 이치를 따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생각이 있으면 도(道)에 계합하지 못하고, 무심(無心)한 중에 절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말하였다. 이 대목은 예로부터 선(禪)의 이치와 상통한다고 여겨 선문(禪門)에서 많이 인용하였다.

망상(罔象)은 《장자(莊子)》에는 상망(象罔)으로 되어 있다. 고대 중국의 군주인 황제(黃帝)가 적수(赤水) 북쪽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했고 상망(象罔)이 찾아냈다고 한다. 상망은 말 그대로 형상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우언(寓言)으로 무심(無心)을 표현한 것이다. 즉 도(道)를 아는 데는 아무리 머리가 좋고 깊이 궁리하여도 무심함만 못하다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비유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비유하는 것만 못하고, 말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비유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비유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고 하였다. 이는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손가락으로 남의 손가락을 비유할 경우 어디까지나 자기 손가락이 중심이 되어 자기 손가락만이 손가락인 셈이 된다. 즉 나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삼아서 남의 손가락을 손가락이라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말과 남의 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것이니 남의 것이니 하는 구별이 없으면 모든 손가락은 다 같고 모든 말은 다 같다. 나아가 천지와 하나의 손가락, 만물과 하나의 말도 둘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위산 선사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묘(妙)로 신령한 광염(光焰)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여,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性)·상(相)이 항상 머물고 사(事)·리(理)가 둘이 아니라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라고 한 말도 위 장자(莊子)의 말과 상통한다. 즉 생각이 일어나면 피아(彼我)가 나뉘어져 중생의 분별 세계가 나타나니, 생각을 돌이켜 생각의 근원으로 돌아가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피아의 분별이 사라져 여여한 진불(眞佛)의 경계가 현전(現前)한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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