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조(唐朝)의 공차(貢茶)

당나라 때는 공차가 불규칙하게 이루어진 전대의 왕조들과는 달리 정부의 주도적인 관리 아래 좀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진연(陳椽) 주편의 《차업통사(茶業通史)》에 의하면,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 742년~755년) 연간에 남악(南岳)에서 공차를 하는데, 관부의 성화로 차의 홍배(灴焙)를 최촉(催促)하여 산농들이 괴로워했다.”라는 기록이 있다.1)

당대(唐代) 이영(李郢)의 《차산공배가(茶山貢焙歌)》에는 “이른 봄인 3월, 차나무에서 아직 찻싹〔茶芽〕이 나오기도 전에 관부에서 공문(公文)을 하달하여 공차를 최촉하니, 찻잎을 따서 갓 만든 지 10일 내로 화급히 황제가 있는 장안으로 즉시 공차를 보내게 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화급히 장안으로 운송되어 올라간 공차는 황족과 황제의 외척들이 청명절 연회(宴會) 때에 음용할 수 있도록 그 기간에 맞추어 제공되었다. 당시의 시인들이 구중궁궐에 거처하는 황제와 금의옥식의 사치를 누리는 황족 및 외척들에게, 진귀한 공차를 마실 때 차농(茶農)들의 수고와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부담감을 덜어주기를 희망할 정도로 산지(産地)에서 공차를 만들어 바치는 차농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대에는 이미 민간에까지 음차풍기(飮茶風氣)가 성행하였으니, 황제가 있는 궁중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궁중에서 소용되는 차는 황제나 황족, 외척들이 직접 음용하는 것 외에 외국 사신이나 변방의 소수민족들에게 ‘회사품(回賜品)’으로 주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므로 궁중에서 소용되는 차는 나날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차는 정식제도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공차를 생산하는 지역은 대단히 광범위하여 산남도(山南道), 하북도(河北道), 회남도(淮南道), 강남도(江南道), 검남도(劍南道) 등에 널리 분표되어 있었다. 이 지역들을 현재의 중국 행정구역으로 보면, 대략 호북, 호남, 하남, 섬서, 사천, 안휘, 절강, 강소, 강서, 복건성 등의 지역이다.

《차업통사》에 의하면, 당나라 대종(代宗) 대력(大歷) 5년(770)에 고저산(顧渚山)2)에 공차원(貢茶院)을 설치하고 공차를 제조하였으며, ‘공산(貢山)’이라 하였다. 이로써 관(官)에서 직접 경영하고 관리하는 공차 제도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곳은 중국 역사상 중앙왕조가 정식으로 설립한 최초의 ‘공차원(貢茶院)’이기도 하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5년(789)에는 공차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 등급은 반드시 청명절 전에 육로로 장안(長安 : 현 西安)까지 운반하여야 하며, 1개월 내에 4,000리를 가야하므로 ‘급정차(急程茶)’로 부르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수륙 양로를 연계하여 4월 전에 도착하여야만 했다. 만약, 차의 싹이 발아(發芽)하지 않아 시일을 맞추지 못한 것은 진공(進貢)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나라 숙종(肅宗) 재위(在位) 연간(756∼762년)에는 상주(常州) 의흥(義興)3) 양선차(陽羨茶)가 공차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양선차는 그 향이 너무 좋아 다신(茶神) 육우(陸羽)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명차이다. 노동(盧仝)는〈다가(茶歌)〉에서 “천자께서 아직 양선차(陽羨茶)를 맛보지 않았으니, 백초는 감히 먼저 싹을 발아(發芽)할 수 없네.”라고 극찬하였다.

또 송나라 때 채관부(蔡寬夫)4)의 《시화(詩話)》 기록에 절강성 호주(湖州) 고저(顧渚)의 자쟁차(紫箏茶)는 당나라 대종 광덕(廣德) 2년(764)에서 영태(永泰) 원년(765) 사이에 공차의 반열에 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호주 자쟁차가 공차의 반열에 올라 매년 청명(淸明)에 진공한 것을 먼저 종묘에 바치고, 나중에 근신(近臣)들에게 하사한다.”고 하였다.

《중국고금차문화대관(中國古今茶文化大觀)》에 의하면 이길보(李吉甫)5)가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8년(813)에 지은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에 보면 몽정산에서 차를 채취하고 만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몽산(蒙山 : 몽정산)의 현 남쪽 10리에 공차가 있는데, 촉(蜀)6)의 것이 최고이다. 매년 청명절 전에 명산현령이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계하고 조복을 입고 산에 올라, 산 위에 있는 사원의 스님과 주지를 청하여 분향(焚香)하고 산신제를 지내게 하는 등 개원(開園) 의식을 행했다. 그 뒤 황차원(皇茶院)에서 차 360근을 채취하여 볶아 차를 만들었다. 차를 두 개의 은(銀)으로 만든 병에 넣어 경도(京都)의 황제에게 조공품으로 보내 제왕(帝王)들의 제사에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동시에 몽산의 상청봉(上淸峰), 감로봉(甘露峰), 옥녀봉(玉女峰), 정천봉(井泉峰), 능각봉(菱角峰) 등에서 채엽한 여러 종의 찻잎은 비벼서 덩어리 차〔團茶〕로 만드는데, 이것을 일명 ‘과자차(顆子茶)’라고 한다. 18개의 은으로 만든 병에 잘 넣어 황다원에서 채엽하여 만든 차와 함께 황제에게 조공으로 바치는데, 이를 가리켜 ‘배공(陪貢)7)이라고 한다.

이조(李肇)의 《국사보(國史補)》에 의하면, 당조의 공차로는 10여 품목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검남(劍南)의 몽정석화(蒙頂石花), 소방(小方), 산아(散芽), 그리고 호주의 고저 자쟁차, 동천(東川)의 신천소단(新泉小團), 창명수목(昌明獸目), 협주(峽州)의 벽윤명월(碧潤明月), 방예(芳蕊), 수유료(茱萸簝), 복주(福州)의 방산로아(方山露芽), 기주(虁州) 향산(香山), 강릉(江陵) 남목(楠木), 악주(岳州) 옹호(㴩湖) 함고(含膏), 상주(常州) 의흥자쟁(義興紫箏), 무주동백(婺州東白), 목주(睦州) 구갱(鳩坑), 홍주(洪州) 서산백로(西山白露), 수주(壽州) 곽산황아(霍山黃芽), 기주(蘄州) 기문단황(蘄門團黃) 등이 그것이다.

여러 문헌의 기록들을 보면, 이상에 거론 된 차들 이외에도 공차의 반열에 올라 있는 차들이 더 있다. 예를 들면, 절강성 여요(余姚)의 선명(仙茗)이라던가, 승현(嵊縣)의 섬계차(剡溪茶) 등이 그러하다.

당대는 중국의 역대 어느 왕조보다 음차 풍조가 매우 성행했던 시기였던 만큼 이상의 기록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더 많은 공차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공차 중에서 어떤 것은 시기나 왕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공차의 반열에서 자리매김하는 차가 있었을 것이고, 또는 잠시 공차의 반열에 들어섰다가 제외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공차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는 것은 비록 한때일지라도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분명히 명차였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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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연(陳椽) 편저, 농업출판사(農業出版社), 1984년.
2) 고저산(顧渚山) : 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호주시(湖州市) 장흥현(長興縣) 수구향(水口鄕) 고저(顧渚)촌. 해발355m.
3) 의흥(義興) : 현 강소성의 의흥(宜興)시이다.
4) 《시화(詩話)》 : 서명(書名). 북송 때의 채거후(蔡居厚)가 역대 시가를 평론한 책. 채거후의 자(字)는 관부(寬夫)이다. 채관부의 또 다른 저서로 《시사(詩史)》가 있다. 그러나 2권 모두 이미 실전되었다.
5) 이길보(李吉甫, 758~814) : 자(字)는 홍헌(弘憲), 당(唐)대의 정치가, 지리학자.
6) 촉(蜀) : 과거 사천성 성도(成道) 일대를 가리는 말.
7) 배공(陪貢) : 정식으로 조공하는 ‘정공(正貢)’과 함께 부수적으로 함께 조공으로 바치는 것을 ‘배공(陪貢)’이라 한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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