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천재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과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배우로 꼽히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만든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미국, 2008)는 욕망으로 일관한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업튼 싱클레어의 1927년 소설 <오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땅속으로 내려가 무의미한 곡괭이질을 하던 젊은 광부가 어쩌다 석유를 발견하고, 석유 시추업자가 되고, 마침내 부를 축적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성공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남자의 성공보다 무너져가는 인생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영화는 욕망의 파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공을 이룰수록 행복은 멀어져 가고, 부를 이룰수록 외로워져 가고, 권력을 쟁취할수록 공허감 때문에 술에 의존하게 되는데, 욕망으로 철저하게 파괴되는 한 남자의 일대기입니다.

주인공인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원래 은을 캐던 사람입니다. 19세기 후반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다들 서부로 떠나던 시절입니다. 다니엘 플레인뷰 또한 그렇게 서부로 흘러 들어와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허황된 꿈에 인생을 거는 수많은 광부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성공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인 ‘욕망에 대한 집요함’과 ‘비지니스 마인드’입니다.

곡괭이가 바윗덩이에 부딪히며 내는 무의미한 파열음을 끊임없이 들으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다가 사고로 한 쪽 다리가 부러졌지만 그 순간 은덩이를 발견하고, 걸을 수 없는 다리를 질질 끌며 땅바닥을 기어서 읍내까지 갔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은덩이를 감정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실천하기 어려운 의지입니다. 다니엘 플레인뷰가 육체의 고통을 능가하는 강한 욕망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또한 그는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을 소유했습니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은광을 캐던 시기부터 아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작은 상자에 앉혀놓은 채 우유에 술을 타 먹이면서 키웠습니다. 사실 이 아이는 다른 광부의 아이인데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키우게 됐습니다. 아이에게 술을 먹여 재워야 하고, 또 아이가 사고로 청력을 잃는 등 귀찮은 일들이 많은 데도 아이를 키우는 이유는, 아이가 비지니스 파트너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아들과 늘 함께 다니는 다니엘 플레인뷰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경쟁 상대들에 비해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계약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곤 했습니다. 이렇게 그가 성공한 데는 그의 양아들인 H.W.(딜런 프리지어)의 공도 컸습니다. 아이를 사업에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광부처럼 좌절한 꿈을 안고 오두막집에서 늙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렇게 집요한 욕망과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 덕분에 사업적 성공을 거뒀습니다. 곡괭이를 들고 땀을 흘리며 땅을 파고 양동이가 뒤집히면서 석유를 뒤집어쓰기도 하던 막노동자였던 다니엘 플레인뷰는 이제 사장이 돼서 많은 사람을 부렸습니다. 그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갔으며 신문에 이름이 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됐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리틀 보스턴에서 시추작업을 할 때 석유가 땅속에서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면서 강한 불길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니엘의 표정입니다. 검은 석유를 뒤집어쓴 채 불길을 지켜보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석유가 매장된 곳을 찾아내고, 시추작업을 통해 석유를 끌어올리고,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오직 석유를 통해서만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석유는 그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는 끊임없이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의 욕망은 기대 이상으로 충족됐지만 그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석유개발업자로 신문에 이름이 날 정도로 유명해졌고, 엄청난 돈도 벌었는데 그는 왜 항상 술에 취해 있을까요? 언제나 술에 취해서 마룻바닥에 쓰러지듯 잠들었으며, 연락하고 지내는 가족도 없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외로운 술주정뱅이입니다.

다니엘 플레인뷰의 돈을 노리고 어떤 남자가 이복동생인 척하고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자신답지 않게 금방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라이벌에 대해서는 강한 증오심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양아들인 H.W.에 대한 그의 태도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자신이 우유를 먹여서 키웠으면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양아들이 사고로 청력을 잃자 그는 아이를 버리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될 걸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아이를 기차에 내버려둔 채 홀로 뒤돌아섰습니다. 그에게 양아들은 그저 사업 파트너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양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다니엘 플레인뷰의 마음이 검은 오일과 같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일찍 가족과 헤어져 외지를 떠돌면서 살아온 그는 애정이 메말랐고, 그 메마른 땅에는 어떤 씨앗도 싹을 틔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 살아왔고, 또 자신을 아버지로 여기며 순종하는 귀여운 아이에게도 결코 마음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그는 두 사람을 살해합니다. 한 사람은 동생 행세를 했던 남자입니다. 이복동생으로 알고 있었던 헨리(케빈 j 오코너)가 사실은 동생이 아니고,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다니엘 플레인뷰는 폭발하듯 분노했고, 분노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생 행세를 하는 남자를 통해 혈육에 대해 약간의 애정을 가졌었는데 이 또한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자 사람에 대한 강한 증오를 느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살인은, 다니엘 플레인뷰가 인간에 대해 완벽하게 신뢰와 애정을 잃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죽인 다른 한 사람은 리틀 보스턴이라는 지역의 교회 목사입니다.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는 일반적인 목사가 아닙니다. 그는 제3계시교라는 사이비종교 목사인데 그가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컸습니다. 그는 사실 다니엘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석유를 통해 욕망을 실현한다면 그는 종교를 통해서 욕망을 실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교회를 비즈니스 수단으로 여기는 인물이고, 항상 다니엘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마지막에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양아들이 청력을 잃었을 때 다니엘은 목사를 때렸습니다. 그때도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 기부를 하라고 요구했는데 다니엘 플레인뷰는 자신의 아들 귀를 고쳐달라면서 목사를 때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목사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목사가 어떤 여자의 관절염을 고쳐주는 걸 봤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약하긴 하지만 신에 대한 다니엘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목사와의 관계를 통해 목사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욕망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마침내 목사를 죽였습니다. 목사의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신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두 건의 살인을 통해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었고, 마음속에서 신을 완전히 떠나보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욕망뿐입니다. 욕망은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면, ‘악마’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니엘 플레인뷰는 목사를 죽이고는 “이제 끝났다”고 중얼거립니다. 욕망의 걸림돌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제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완벽하게 욕망 덩어리가 됐고, 다르게 표현하면 악마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제목에서도 드러납니다. 제목은 성경의 한 구절입니다. ‘there will be blood(피가 있으리라)’ 입니다. 파멸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묘사한 인간은 신을 외면하고, 오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식을 돌보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을 바른 쪽으로 인도해야 할 교회조차 욕망의 노예가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과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신의 능력을 부여받았다면서 기적을 보여주기까지 하는 목사는 입만 열었다 하면 돈 얘기를 하고, 교회를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타락상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신의 심판을 받아 파괴됐는데,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보여준 인간의 삶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는 유황과 불로써 파괴됐다고 <창세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심판 또한 이런 형식을 띕니다. 주인공인 다니엘 플레인뷰는 석유개발업자이고, 그는 끊임없이 땅속에서 검은 오일을 퍼냈습니다. 오일의 속성은 에너지를 일으키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석유가 솟구치면서 불이 붙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유조탑을 태우는 모습이 나왔는데, 이 모습처럼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불길이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마침내 스스로 사그라져간 것처럼 주인공의 욕망 또한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코엔 형제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함께 제8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란히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아쉽게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수상했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둘 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매우 암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종말론적으로 이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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