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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초기불교의 차별금지법 Ⅲ
중도는 차별과 갈등 단절하는 가르침
2017년 05월 31일 (수) 10:14:36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세계관의 문제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관련해 있다. 모든 인간의 행위와 삶은 그대로 세계관의 표현이다.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정치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노사 갈등 등의 갈등과 충돌이 이야기된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은 각기 특정한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관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거나 지배하기도 한다. 때문에 초기불교는 당시의 모든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출발했다. 예를 들어, 당시 유신론(有神論)이나 운명론(運命論) 그리고 우연론(偶然論)에 대한 3종 또는 5종 외도설의 비판은 개인의 실천 문제에서부터 사회적인 실천의 문제까지 모든 문제에 걸쳐 나타난다. 이는 다분히 사회 계몽적인 성격의 비판인데, 이유는 인간의 행불행(行不幸) 또는 고락(苦樂)이 이러한 세계관적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와 삶에는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반대로 각자의 세계관은 각각의 다른 삶을 구성해 낸다. 이는 부처님이 중도의 내용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한 데도 그대로 나타난다. 팔정도에 올바른 세계관을 의미하는 정견(正見)이 먼저 제시되는 이유이다. 정견은 올바른 세계관으로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에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세계관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는 상대적인 대립의 세계관에 뿌리 한다. 상대적인 대립의 양변(兩邊)은 인간사회에 있어 우열(愚劣)과 빈부(貧富), 귀천(貴賤), 미추(美醜), 정(淨)과 부정(不淨), 다소(多少), 고하(高下), 장단(長短) 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이 같은 상대적인 이변(二邊) 또는 양변을 분별하는데 매몰되어 있다. 마치 이러한 이변과 양변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강하게 집착하여 대립과 충돌 속에 있다. 이변의 분별은 갈등과 대립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불행하게 한다.

차별은 어떠한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녀 차별, 인종 차별, 민족 차별, 종 차별, 외모 차별, 종교 차별, 빈부 차별, 지역 차별 등이 그것이다. 인류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이변에 따른 차별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나아가 이변으로 시작하는 차별의식은 결국 서로 간 폭력으로 귀결된다. 다시 이러한 차별로 인한 갈등과 대립의 근거는 바로 이분법적인 분별에서 시작한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불이(不二) 중도는 기본적으로 차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천법이다. 인간의 괴로움은 바로 이분법이며 이원론적인 분별과 차별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이(不二) 중도는 차별로부터 벗어난 실천임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편견에 따른 차별은 동서고금에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간들의 보편적인 심성이다.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 무의식적으로, 또는 습기(習氣)로 곧바로 대상을 분별(分別)하고 차별한다. 불교는 이를 중생심이라 한다. 다시 차별은 분노를 야기한다. 차별받는 사람과 대립하고 다툼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너와 나 모두가 더욱 괴로운 사회를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차별(差別)없는 세상을 원한다. 차별은 너와 나의 고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래로 남녀 차별, 인종 차별, 민족 차별, 외모 차별, 종교 차별, 빈부 차별, 지역 차별 등이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종교와 관련해서도 차별 문제가 부상되고 있다. 더 나아가 해외 또는 북한 이주민 대 원주민, 강남 대 비강남, 서울 대 지방, 명문대 대 비명문대, 장애 대 비장애 등의 차별이 많이 거론된다. 때문에 한국사회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차별금지의 내용과 범위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의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동성애), 성 정체성, 학력, 고용 형태, 사회적 신분, 그 밖의 사유를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로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이유로 “어느 하나의 영역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기본적으로 차별은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라는 우열(愚劣)의식에 바탕한다. 백인우월주의와 같은 차별은 현재에도 인종 간, 민족 간 다툼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차별받아 온 것처럼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이주노동자를 차별한다. 종교차별은 동양보다는 서양이 더 오래되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셈족 3대 자매종교의 종교전쟁은 물론, 같은 기독교 내에서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의 광기어린 살인과 전쟁은 하룻밤 사이에도 수천 명을 살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차별 전통은 기독교와 함께 우리에게까지 전래되어 급기야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이 거론되고 있다. 기독교는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있다. 어디 서구종교 뿐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성리학 전통의 사대부와 양반은 어떠했는가?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조선 500년 동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해 유치하고 비열한 차별을 자행하였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에서조차 외모와 장애 그리고 빈부 등의 차별의식에 서로를 배제하고 분노하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른과 사회로부터 주입된 편견과 차별의식에 부림[使]받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커서 다시 내면화된 차별의식을 후손에게 대물림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분석한 프로파일러들에 따르면 성장 과정의 부당한 차별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차별에 대한 아픈 기억은 자신은 물론 다른 이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미추(美醜)라는 외모차별은 성형수술을 성행시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종차별은 얼마나 극단적인가? 사람이 동물을 먹기 위해 죽일 때도 독일인이 유대인을 죽일 때처럼,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을 학살할 때처럼, 죽어가는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자식이나 가족 또는 가까운 이웃의 고통에는 공감한다. 만약 동물의 고통을 사람과 같은 것으로 공감한다면 함부로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간, 사람과 동물 또는 자연 간을 우열 관계로 보려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유신종교에서는 인간이 동물이나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우열의 근거를 말한다. 때문에 유신종교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자비를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세계관 즉, 생각과 견해의 차이에 따라 인간은 물론 자연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월의식에 따른 차별은 위계적 질서를 구축한다. 부처님 당시의 바라문교는 사성(四姓)계급은 범신(梵神)으로부터 유래한 천부(天賦)적 것이라며 인간 차별을 합리화했다. 이스라엘인만이 그들의 신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선민(選民)이라는 의식은 현재에도 유대인의 배타적인 결속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정 계급이나 민족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욕망에 따라 신으로부터 인간과 세계를 수직적으로 위계화 시키는 것이다. 최고 정점의 신과 아래의 인간, 인간 가운데도 남녀의 위계, 그리고 다시 동물이라는 위계는 바로 차별과 종속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신에 종속되는 주종(主從)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다시 여자는 남자에 종속되고 동물은 인간에 종속되는 차별의 근거를 정당화한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우열에 바탕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세계관의 근거인 신과 그로 인한 계급제도인 카스트를 부정하는 세계관이다. 인간을 차별하여 고통으로 나아가는 질곡의 세계관을 그 뿌리에서부터 단절시키는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 행위와 사회적 제도의 뿌리가 되는 세계관을 교정시키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위계에 따른 모든 차별과 고통의 문제를 일깨웠다. 이처럼 계급과 같은 사회 문제는 물론, 더 나아가서 민족과 인종, 그리고 현대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부처님의 중도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조준호 |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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