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이 영화화해 성공을 거둔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어린 10대 소년이 사나운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한 순간 잃고, 언제 자기를 해칠지 모르는 호랑이와 공존 아닌 공존을 하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한 소년의 이야기가 울림을 전한다. 특히 이 작품은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후 3년 동안 베스트셀러 상위에 머물렀으며,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돼 700만 부가 팔린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음은 물론이고 2002년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문학성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작가 얀 마텔은 1963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알래스카, 코스타리카, 프랑스, 멕시코 등 다양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이란, 터키, 인도 등지를 순례했다. 캐나다 트렌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27세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로 등단한 그는 《파이 이야기》로 ‘2002년 부커상’을 받았다. 대부분의 출판인들이 “예측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캐나다 출신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얀 마텔의 수상을 점쳤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에는 유일신교적인 메타포와 불교적인 메타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종교적인 삶은 무엇인가’와 ‘삶은 종교적으로 무엇인가?’를 두루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파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파이의 부모는 동물원을 운영한다. 그러다가 동물원 문을 닫고 캐나다로 가는 배를 탄다. 배에는 동물들도 태운다. 폭풍을 만나 동물들과 자신만 살아남게 된다. 구명보트에서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다.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하이에나를 죽인다. 결국 보트에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함께 지내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구명보트에 선원, 요리사와 파이의 엄마, 파이가 타게 된다. 요리사는 선원과 파이의 엄마를 죽여 물고기 미끼로 쓴다. 파이는 그 요리사를 죽여 미끼로 쓰게 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의 우화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반전과 함께 독자들은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 해답은 1884년에 벌어진 난파선 미뇨넷호 사건에 있다. 미뇨넷호가 침몰했을 때 구명보트에는 세 사람이 몸을 싣게 됐다. 그런데 더들리라는 선장이 스티븐스라는 항해사와 모의해서 급사 소년인 리처드 파커를 살해한 뒤 그 인육을 먹었다.

소설 속 정황상으로 봐도, 원작의 모티브가 된 미뇨넷호 사건으로 봐도 보트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뒤늦게 파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작품 속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연과 인간사회가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흔히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자연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입장과 자연은 약육강식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견해 중 작가는 어디에 동의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주인공의 이름이 파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아름다운 해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피신’은 오줌싸개라는 뜻이어서 주인공은 친구들로부터 수시로 놀림을 받는다. 하여, 주인공은 ‘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

잘 알다시피 파이는 ‘원둘레의 길이와 원의 지름의 비율’을 일컫는 원주율(圓周率)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인류는 정확한 원주율을 찾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숫자만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원주율은 절대적인 가르침에 다가갈 수 없는 인간 존재와 유사하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에서 조난당한 파이가 리처드 파커라는 환영의 분신을 만드는 것은 뱅골 호랑이처럼 의연히 삶을 헤쳐 나가고 싶은 자기 의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사상에 입각해 보면, 이 영화는 ‘자연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라는 화두와 ‘중생은 완전무결한 불성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러한 화두의 해답은 망망대해에서 올리는 파이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망망대해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하는 순간이 되자 파이는 신성을 깨닫게 된다. 망망대해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 파이의 모습은 육조 혜능 대사가 설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떠올리게 한다.

책장을 덮은 뒤에는 마지막 질문을 갖게 된다. 《파이 이야기》는 희극인가, 아니면 비극인가 하는 질문이다. 솔직히 그 해답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파이처럼 긍정적 허무주의를 몸소 체득할 만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