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긷고 향 피워서 복전이나 빌며
마구니 굴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
몇 겁 동안 약상 신세 물속의 거품이었지
이 몸이 불 속에 핀 연꽃임을 문득 알겠구나
소를 모는 것이 오대산 성인임을 누가 알리요
북을 치는 여암 선인은 만나기 어려워라
망념을 잊은 한 생각이 도리어 구속받는 것
봄새가 울어 나그네 잠을 깨우누나

添香換水願福田 鬼魔窟裡送驢年
弱喪幾劫水中泡 忽覺當身火裏蓮
驅牛誰識五臺聖 擊鼓難逢呂巖仙
忘機一念還滯殻 春禽啼盡惱客眠

해설

이번에는 경허 스님의 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 한 수를 소개할까 한다. <물외잡영(物外雜詠)>이란 제하(題下)에 실려 있는 56수 중 19번째 시이다. ‘물외잡영’은 본래 제목이 아니라 한암 스님이 경허 스님의 시를 정리하여 《경허집》을 편집할 때 제목이 없던 시들을 묶어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물을 긷고 향을 피워서 복전(福田)을 비는 것이야 말로 승려의 일상생활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마구니 굴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낸다고 하였다. 마구니는 번뇌 망상을 가리킨다. 나귀는 십이간지(十二干支)에는 없는 동물이니, 나귀의 해는 본래 없다. 즉 번뇌 망상 속에서 본래 없는 세월을 보냄이 없이 보낸다는 말이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만 그 일어난 당처(當處)가 텅 비어 번뇌 망상이 일어나되 일어나는 바가 없는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깨닫고 보면 번뇌 망상이 곧 불성(佛性)이라는 것이다. 경허 스님은 다른 시에서 이러한 경지를 “술도 혹 방광하고 여색도 그러하니 탐진치 번뇌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酒或放光色復然 貪嗔煩惱送驢年〕.”라 하였고, 나아가 <오도가(悟道歌)>에서는 “사대(四大)와 오음(五陰)이 청정한 법신이라, 극락세계는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이요, 화장찰해(華藏刹海)는 검수지옥과 도산지옥이로다.”라 읊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불국토와 지옥도 둘이 아니라 똑 같이 하나의 불성(佛性)이 여여(如如)하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말하였다.

송(宋)나라 대혜 선사(大慧 禪師)는 스승 원오 선사(圓悟 禪師)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 저녁 소참(小參) 법문에서 “만약 어떤 승려가 ‘원오 선사가 천화(遷化)하여 어느 곳으로 갔는가?’라고 묻는다면 곧 그에게 말하기를 ‘대아비지옥(大阿鼻地獄)으로 갔다.’라 하리라. ‘그 뜻이 어떠한 것입니까?’라 하면, ‘배고프면 끓는 구리물을 먹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신다.’라 하리라. ‘도리어 구제해줄 사람이 있습니까?’라 하면, ‘도리어 구제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여 구제하지 못하는가. 이 어른이 평상시 늘 하는 일이니라.’라 하리라.”라고 하였다. 지옥에서 끓는 구리물을 먹고 쇳물을 마시는 것이 원오 선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근래 성철 스님의 열반송에 “산 채로 아비지옥에 빠져 한이 만 갈래인데 둥근 해는 붉은 빛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네〔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라 한 것도 그 전거(典據)가 여기에서 온 것으로, 극락과 지옥, 생사와 열반이 본래 둘이 아님을 표현하였다.

약상(弱喪)은 어려서 고향을 잃은 사람이란 말로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내 어찌 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어려서 고향을 잃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지 않은 줄 알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본래 불성(佛性)을 망각하고 길을 헤매는 중생을 뜻한다.

즉, 과거 오랜 전생 동안 고향을 잃고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살았는데, 알고 보니 현재 이 허깨비 같은 줄만 알았던 육신이 불 속에 핀 연꽃이라 그대로 법신(法身)이더라는 것이다.

오대산 성인은 문수보살이다. 당(唐)나라 때 무착 선사(無著 禪師)가 남방의 항주(杭州)로부터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기 위해 북방의 오대산에 당도하여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실은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다 한다. 여암(呂巖)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전설에 나오는 팔선(八仙) 중 한 사람이다. 자는 동빈(洞賓)이고 호는 순양자(純陽子)이다. 동정호(洞庭湖)를 날아서 건너갔다는 전설이 있다. 송(宋)나라 조여우(趙汝愚)의 <신수루가 낙성되어〔神秀樓落成〕>란 시에 “날아가는 신선이 북을 쳐 풍이를 놀라게 한다〔飛仙擊鼓驚馮夷〕.”라 한 것이 여암의 고사를 인용한 듯하다. 풍이는 수신(水神)이다.

소를 모는 평범한 범부가 문수보살인 줄은 사람들이 모르고 불로장생을 얻으려 신선을 찾건만 신선은 만나기 어렵다. 이를 두고 <오도가>에서는 “소를 몰고 말을 모는 이가 보현이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본래 비로자나불일세.”라고 하였다.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모르고 따로 신선을 찾는 것이 바로 중생 소견인 것이다.

망념을 잊었다는 한 생각이 도리어 큰 망념이 된다. 망념이 그 체성(體性)이 텅 비어 망념이 아닌 줄 사무쳐 알면 망념이 일어나도 망념에 끌려가지 않는다. 따로 망념이 없는 경계를 찾으면 망념이 없는 경계가 곧 망념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이나 잘 뿐이다. 따스한 봄날 새가 울어 혼곤한 잠을 깨우는 일 밖에 없으니, 참으로 무사인(無事人)이 아닌가.

일 없는 게 도리어 일이 되기에
문을 닫고 방안에서 대낮에 조노라
산새들이 나 홀로 있는 줄 알고서
그림자를 비추면서 창 앞을 지나가네

無事猶成事 掩關白日眠
幽禽知我獨 影影過窓前1)

주) -----
1) 《경허집》 <물외잡영(物外雜詠)> 중 50번째 시이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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