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전후의 고려사회는, 특히 무신란(1170년)을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하여,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한 격동기였다. 이것과 맞물려 불교계 내부에서 많은 자각과 반성이 있게 되고, 이것은 결사 운동으로 농축된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개창한 수선사(修禪社)와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1245)가 중심이 된 백련사(白蓮社)에서 일어난 결사운동(結社運動)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결사는, 승려들이 절집에서 정기적인 수행기간인 여름·겨울 석 달씩의 안거(安居)를 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목적을 세우고 그 것을 이룰 때까지 오랫동안 행하거나 1만 일 등의 기간을 정해 놓고 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선사는 사굴산문 출신의 보조국사 지눌이 불교혁신운동과 더불어 개창하고 결성한 것이다. 명종 12년(1182) 지눌은 25세 되던 해에 수도인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서 동학(同學) 10여 명과 파회(罷會) 후에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자고 결사를 약속한다. 하지만 실제로 정혜결사는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후일을 기약하게 된다. 지눌은 “그 뒤에 우연히 선불장(選佛場)의 이익과 손해되는 일로 인해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고, 아름다운 기약을 이루지 못한 지 거의 10년이 지나갔었다.”1)라는 글에서 보이듯이, 동지들과 헤어져 개인적인 수도에 전념한다. 20대의 독립적이고 비판정신이 왕성한 지눌의 눈에 비친 당시의 사회와 불교계의 상황은 크게 잘못된 모습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모순에 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본래의 출가정신으로 돌아가 본연의 자세로써 수행에 정진하는 혁신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사운동은 이때부터 태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은 25세 이후의 수행과정에서 세 번의 전기를 맞는다. 그 첫 번째는 창편(昌平) 청원사(淸源寺)2)에서 일어난다. 지눌은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인식하지만 객관경계에 물들지 않나니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하다.”3)라는 구절에 이르러 놀라고 기뻐하며 일찍이 얻지 못했던 경계(境界)를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면서 이 게송(偈頌)을 읊조리며 스스로 그 깊은 뜻을 얻는다.

두 번째 전기는 28세 때인 명종 15년(1185)에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4)에서 3년 동안 대장경(大藏經)을 열람하다가 일어난다. 지눌은 여기서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한 티끌 가운데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는 비유와 그 뒤에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마음속에 갖추어 있지마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5)는 구절을 읽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경을 머리에 이고 모르는 결에 눈물을 떨어뜨렸다.6) 선문(禪門)의 즉심즉불(卽心卽佛)과 《화엄경》의 깨달음의 길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화엄교학에 대하여 아직 미진함을 가지고 있었다.7) 그러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가 지은 《화엄론》의 십신(十信)의 초위(初位)의 해석을 보게 된다. “각수보살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임을 깨닫는 것이니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제 몸과 마음의 분별하는 성품은 본래 능소가 없어 바로 부동지의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며, 셋째는 제 몸과 마음의 정사를 잘 가리는 묘한 지혜를 깨닫는 것이니 그것은 문수사리의 신심의 첫 깨달음이다. 이 삼법을 각수(覺首)라 한다.” 또 말하기를 “범부의 지위에서 십신8)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모두 자기가 범부임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동지의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9)는 구절에서 지눌은 선교의 일치에 대해서 크게 깨닫게 된다.10) 지눌이 보기에는 화엄사상은 그의 선사상 체계를 도입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였을 것이다.

12∼13세기의 고려불교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으로는 법계에 대한 철학적 이론만을 추구하고 그 법계를 스스로 증거(證據)하려는 실천행이 없는 화엄교가(華嚴敎家)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갓 좌선(坐禪)에만 골몰하는 선승(禪僧)들이 바로 그 면면이다. 화엄교가들에 의하면 법계란 체증되어 질 수 없다고 여겨지므로 이론에 골몰하게 되고, 선승들은 이에 반해서 선수행의 철학적 기초를 분석한다는 시도를 일체 배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지눌이 당면한 과제는 선과 화엄불교 사이의 불필요한 상호분열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눌은 자기와 동시대의 불교도들을 관찰한 결과, 두 진영이 모두 자기들의 종교생활의 기초와 목적을 오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처럼 불교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회통하는 작업이 지눌의 과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11)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하지만 지눌은 원돈의 관문에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고, 정혜결사에서의 실천문의 하나인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12)의 이론적 기반을 정립하게 된다. 따라서 지눌의 원돈관문에 대한 확신은 정혜결사에서의 지도 원리의 정립이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고려불교사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데에 그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13)

주) -----
1)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전서(普照全書)》, p.29. “其後偶因選佛場得失之事, 流離四方未修佳期者, 至今幾盈十載矣.”
2) 이곳이 어딘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전라남도 담양이나 나주 부근의 절이거나 경기도 가평 현등사 혹은 강원도 청평사 중의 한 곳일 가능성이 많다.
3) 〈비명(碑銘)〉, 《보조전서》, p,419. “閱六祖壇經至曰, 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象, 而眞性常自在.’乃驚喜, 未曾有.”
4)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학가산.
5)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 《보조전서》, p.173.“至閱華嚴經出現品, 擧一塵, 含大千經券之喩, 後合云, ‘如來智慧, 亦復如是, 具足在於衆生身中, 但諸凡愚, 不知不覺’予頂載經卷, 不覺殞涕.”
6) 역시〈화엄론절요서〉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비명〉에는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이라고 되어 있지만 지눌의 저작인〈화엄론절요서〉의 입장을 따랐다.
7) 〈화엄경절요서〉, 《普照全書》, p.173. “然, 未詳今日凡夫最初信入之門.”
8)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 52위(位) 중 처음의 10위.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믿어 의심이 없는 지위(地位). 신심(信心), 염심(念心), 정정진(精進心), 혜심(慧心), 정심(定心), 불퇴심(不退心), 호법신(護法心), 회향심(廻向心), 계심(戒心), 원심(願心)의 십신(十信)이 있다.
9) <화엄론절요서>, 《보조전서》, p.173.“覺首菩薩者, 有三. 一覺自身心, 本是法界, 白淨無染故. 二覺自身心分別之性, 本無能所, 本來是不動智佛, 三覺自心善簡擇正邪妙慧, 是文殊師利. 於信心之初, 覺此三法, 名爲覺首.’又云, ‘從凡入十信難者, 摠自認是凡夫, 不肯認自心是不動智佛故.”
10) <화엄론절요서>의 위에서 인용한 구절 이후에서, 지눌은 계속해서 교(敎)와 선(禪)의 일치에 대해서 자기가 깨달은 것을 서술하고 있다. 즉 여래가 입으로 설한 것이 교(敎)요, 조사(祖師)가 마음에 전한 것이 선(禪)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11) Jae Ryong Shim,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f Korean Zen Buddhism: the integration of Son and Kyo by Chinul(Hawaii Univ 박사논문, 1979), pp.1~10.
12) 원(圓)은 원만 완전(圓滿完全)하다는 뜻이고, 돈(頓)은 일시에 대번 뛰어 오른다는 뜻이니 한꺼번에 뛰어올라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원만하고 완전하게 성취하는 도(道)라는 의미가 된다.
13) 최병헌,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취지와 창립 과정〉. 《보조사상》5·6합집(보조사상연구원, 1992), p.59.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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