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미국)는 이번 201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화제가 된 영화입니다. <문라이트>에는 톱스타가 나오지 않으며, ‘배리 젠킨스’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흑인 감독의 작품이고 흑인만 나오는 저예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결코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같던 <라라랜드>를 누르고 201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아주 작은 관에서 10여 명의 적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봤는데 영화를 본 후 풍경은 천만 관객이 들었던 영화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대부분 흥행 영화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문라이트>는, 영화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조용하게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나 또한 그랬습니다.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던져진 것처럼 무거워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표현 방식은 시적이고, 전달하는 메시지는 산문적이었습니다. 흑인 소년의 성장담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한 소년이 결국 마약상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접근 방식이 새로웠습니다. 기존 가치관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소심하지만 선량해 보이던 소년은 분명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나은 삶을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구스반산트 감독의 <파인딩포레스트>의 자말처럼 재능을 인정받고 주류 사회에 편입될 줄 알았습니다. 그것만이 가치 있는 것처럼 훈련받았으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만났던 후안아저씨처럼 마약상이 됐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맞는 것입니다. 소년이 성공신화를 일굴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 이런 스토리에 길들여진 뇌의 조건반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빈민가의 흑인 소년들 중 성공하는 케이스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매우 미약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들의 부모처럼 그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라이트>는 지극히 현실적이었습니다. <문라이트>에서 이런 리얼리티가 가능한 것은, 이 영화가 타렐 앨빈 맥크래니라는 작가의 자전적 희곡을 영화화했기 때문입니다.

<문라이트>는 한 흑인 소년이 마약판매상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비록 이런 결과가 됐지만 소년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조명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 소년이 어두운 환경으로 인해 나쁜 사람의 길을 가게 된다면 대체적으로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파고들 수밖에 없으며 기조는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소년이 이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운명으로 설정하고, 운명은 결코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 그렇지만 인간은 주어진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3개의 챕터로 구성됩니다. 각 챕터는 주인공 샤이론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해서 시작합니다. 샤이론은 어릴 때는 리틀(알렉스 R. 히버트)로, 청소년기엔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으로, 그리고 성인이 돼선 블랙(트래반트 로즈)으로 불렸는데, 영화는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파고듭니다. 결과를 얘기하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입니다. 겉모습이 다르지만 샤이론은 샤이론인 것입니다.

리틀로 불리던 시절의 샤이론은 약간 움츠러든 어깨와 겁먹은 것 같은 눈빛을 한 말수 적은 소년이었습니다. 거기다 소년의 엄마는 마약중독자입니다. 아버지는 설명도 없이 처음부터 부재하고, 또 소년이 아이들에게 호모나 게이로 놀림 받는 걸 보면 성적으로 모호한 면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년은 당연히 말썽꾸러기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도 리틀은 자신을 괴롭히는 형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집은 마약 판매상인 후안(마허샬라 알리)이 약을 숨겨두는 곳으로 거기서 소년은 후안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후안은 소년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소년의 마음속에는 후안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것인지 소년은 마약에 취한 엄마가 내쫓으면 후안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마다 후안은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바닷가에서 수영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밥을 챙겨 먹이고 친구가 돼주고, 가끔은 용돈도 주고, 그리고 어김없이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후안은 좋은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리틀 엄마에게 마약을 파는 사람입니다.

후안은 리틀의 미래였습니다. 처음에는 리틀이 후안같이 좋은 어른을 만나 빈민가에서 벗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헛된 꿈이었습니다. 청소년이 된 소년은 이젠 리틀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샤이론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다를 뿐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마약중독자입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여전히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고, 샤이론은 그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성적 정체성은 모호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든든한 후원자였던 후안이 이제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거리의 마약상다운 죽음이지요.

후안은 거리에서 마약을 팔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외로운 소년에게 너무나 친절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후안이 마약상이 된 건 그의 의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무척 모순되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영화는 마약상이 되는 것을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바라봤으며, 그들은 사악한 인간으로 낙인찍었는데, 이 영화는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흑인이 되고 게이가 되는 것처럼 일종의 운명적인 걸로 봤고, 그들도 피해자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어른이 된 샤이론은 ‘블랙’으로 불리었고, 리틀과 샤이론으로 불릴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연약해 보이던 외모는 간 데 없고, 울퉁불퉁한 팔 근육이 돋보이는 건장한 남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렸을 때 유일하게 그에게 친절했던 후안처럼 마약 밀매상이 돼 거리로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때 약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소년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샤이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됐습니다. 나름 유능한 마약 상이 돼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걸고 비싼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블랙은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샤이론이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소년 케빈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빈은 샤이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샤이론을 배신했습니다. 깊은 상실감을 안고 샤이론은 아이들과 싸움을 했고, 이 일로 감옥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블랙은 케빈의 전화를 받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케빈을 만나러 갔습니다. 케빈은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샤이론의 변신에 매우 놀라면서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가 아닌 것 같아”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거기서 샤이론은, “나 만져준 건 너 뿐이었어”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신을 배신했지만 지금까지 케빈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지키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케빈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나중에는 여자를 만나 아이도 낳았지만 블랙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습니다.

덩치 크고 험상궂은 흑인 남자의 순정, 정말 어울리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것이 이 영화가 하고픈 말이라고 봅니다. 그냥 겉모습으로 봤을 때 케빈은 훨씬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또 제대로 사는 것 같고, 블랙은 거리의 부랑아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이면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케빈이야말로 자신의 철학이 없이 환경에 따라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먼저 연락을 했던 것도 식당에서 어떤 손님이 틀어놓은 음악을 듣다가 예전에 블랙이 들었던 음악이라는 기억을 떠올리고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블랙은 지금까지 한결같이 케빈을 사랑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샤이론과 케빈이 보름달이 밝은 밤바다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둘은 바닷바람을 느끼면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그런 대화를 나눕니다. 또 영화 첫머리에서 후안이 소년의 몸을 지탱해주면서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보라고 합니다. 물 위에 떠있을 때의 그 편안함을 느끼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의 공통점은 리틀이니 샤이론이니 블랙이니 하는 이름도 없고, 흑인이니 게이니, 하는 편견도 없으며, 마약밀매상이라는 낙인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 자체로서 자신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달빛 아래서는 흑인도 백인처럼 파랗게 보이는 것처럼.

비록 흑인이고 빈민가에 태어나 마약밀매상의 거친 삶이라는 영역에 떨어졌지만 블랙은 여전히 누구보다도 지고지순한 마음을 갖고 있고, 또 후안은 불쌍한 아이에게 한없이 다정했고, 존재 그 자체로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발에 밟히며 자라는 민들레도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봅니다. 이런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고,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영화는 없었습니다. 사회 밑바닥의 주인공은 그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들 속에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려고 애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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